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제현의 예감은 적중했다. 기삼만의 옥사에 권문세족들은 조직적으로 항거했다. 먼저 전 충주판관 최순보가 상소를 올렸다.
“전하, 기삼만의 횡포가 다소 있었다손 치더라도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었사옵니다.” 
찬성사 강윤충(康允忠)도 상소를 올려 옥사의 문제점을 적시했다. 
“전하, 정치도감은 개혁을 빌미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그 부작용을 바로잡아야 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상국(원나라)에서 다시 왕후를 정치도감의 판사로 임명하여 정치도감을 재건하려 하고 있지만, 차제에 정치도감을 혁파해야 하옵니다.” 
행성이문 배전(裴佺)도 이에 질세라 기세를 올렸다.
“전하, 기삼만은 기황후의 집안 동생으로 원 황실에서 그냥 있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이에 합당한 조치를 미리 할 필요가 있사옵니다.” 
권문세족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고려 조정의 개혁기구인 정치도감을 원나라의 정동행성이문소에 고발하는 매국적 작태를 서슴지 않았다. 
결국 덕녕공주의 지침을 받은 충목왕은 다음과 같은 비답을 내렸다.
“정치도감의 개혁 작업을 일단 중지하라.”  
이렇게 하여 거침없이 추진되고 있었던 정치도감의 개혁 작업은 시작 2개월여 만에 사실상 중지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정치도감은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고려의 정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적극적인 개혁사업을 추진했으나, 개혁 자체가 원나라의 지원과 개입에 의해 추진된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개혁 주도세력인 이제현, 왕후, 안축, 박충좌, 김륜 등은 국정에서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다.  

덕녕공주, 신하와의 사랑, 
폐행 세력들의 정권 농단 

신예(辛裔), 전숙몽(田叔蒙), 강윤충, 배전 등 폐행세력들은 덕녕공주를 움직여 다시 조정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막강한 힘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정권을 농단하여 불과 몇 달 동안에 그들의 인척과 친구들이 경상(卿相)의 대열에 늘어서게 되었다.
임금은 겨우 열한 살이라. 섭정모후 덕녕공주는 국왕과 함께 원나라 사신을 맞이했고 직접 인사를 관장했다. 자신이 군주의 자리인 남면(南面)에 위치하고, 충목왕이 동면(東面)을 할 만큼 최고 정치권력을 휘둘렀다. 
덕녕공주는 폐행들을 불러 다짐을 받곤 했다.
“전하께서 성년이 되실 때까지 물샐틈없는 경계가 있어야 할 줄로 압니다.” 
원나라 환관 고용보의 처남으로 신왕(辛王)으로 불려지던 참리(參里, 첨의부의 종2품) 신예가 성리학자들을 모략하는 이야기를 했다.
“대비마마. 왕후가 수상이 되어 정치도감을 설치, 부원세력과 비리관료를 척결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익재 대감을 영수로 한 성리학자들이 자신들의 세를 확산하여 조정을 좌지우지하기 위한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러니 저들에게 현혹되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이어서 좨주(祭酒, 국자감의 종3품) 전숙몽이 아부발언을 했다. 그는 충목왕 즉위년에 덕녕공주의 뜻을 거슬러서 동래에 귀양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아첨이 극에 달했다.
“대비마마, 성리학자들이 선왕 대의 폐정을 개혁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대비마마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덕녕공주의 총애를 다투고 있는 강윤충, 배전이 한목소리로 말했다.
“개혁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만큼 주상께서 친정(親政)을 하실 수 있을 때까지 국정의 고삐를 한시도 놓으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나는 여러분들만 믿고 있습니다.”
“이를 말씀이옵니까, 대비마마!”
한 사람은 주상의 모후요, 나머지 신하들은 《고려사》의 <간신열전>에 올라 있는 간신배들이었다. 이들은 나라의 일보다는 개인의 사리사욕을 앞세운 소인배들이어서 의기투합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후 원나라는 부원세력이 개혁의 대상으로 부각되자 개혁정치의 지속이 고려 지배의 걸림돌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정치도감의 활동을 저지하였다. 결국 정치도감의 개혁활동은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충정왕 원년(1349)에 혁파되고 만다.
한편, 30세가 안 된 과부 덕녕공주는 고려의 개혁보다 사랑하는 남자를 택했다. 대륙을 호령하던 몽골인의 뜨거운 피를 가진 활달한 북방여인은 자신의 타오르는 정념을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사관(史官)은 고려의 정치개혁이 좌절된 이유를 덕녕공주에게서 찾고 있다.
덕녕공주는 젊은 몸으로 궁중에 있었는데 강윤충과 배전이 드나들면서 공주의 총애를 받아 정권을 잡고 상벌을 마음대로 행하였다. 왕후와 김영돈이 황제의 명을 받들어 옛 폐정을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강윤충 등의 모함에 빠져버리니 식자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찬성사 강윤충(康允忠)은 원래 천인이었으나 충혜왕의 엽색행각을 부추기던 채홍사이다. 그는 배전(裵佺)이 덕녕공주와 사통(私通)하고 있음을 부러워하며 시기 질투했다. 그리하여 내시와 궁녀를 매수하여 ‘강윤충이야말로 고려 제일의 사나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였다. 덕녕공주는 이 소문을 듣자 많은 여성편력을 가진 강윤충의 절륜한 정력이 마음에 끌렸다. 그리하여 시녀를 시켜 강윤충을 유혹했다. 마침내 강윤충은 덕녕공주의 사랑을 차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강윤충은 광기 어린 덕녕공주의 정부(情夫)로서 밤이 되면 내전을 자기 집 사랑방 드나들 듯하였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 했던가.

1348년(충목왕4) 정월 초. 
달빛이 싸느랗게 쏟아지고 있었다. 대궐 안 숲속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사이를 비호처럼 헤쳐 나가는 사람이 있었는데 검은 그림자는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昇平門) 앞에 멈추어 섰다. 그 사나이는 무엇인가를 품속에서 꺼내 승평문 기둥에 붙이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똑같은 내용의 익명서는 만월대 밖 십자가의 관청 기둥과 저자거리의 벽에도 동시에 나붙어 있었다. 

여자 임금이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강윤충 등이 아래서 권력을 농단하고 있으니 이는 곧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다. 찬성사 강윤충은 내시 한 명과 시녀 한 명을 중매 삼아 임금의 어머니와 간통하여 음행(淫行)을 마음대로 하고 있다. 이리하여 내전의 총애를 얻어 가지고 하유원(河有源)과 함께 정치도감 사업을 저해하고 있다. 
만약 이 두 명을 죽이면 나라의 우환이 사라질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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