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학창 시절, 음악은 감성을 고양시키는 과목이 아니었다. 단순한 암기과목이자 수학이었다. 음악의 아버지는 바흐이고 음악의 어머니는 헨델이라는 것을 외워야 했고, 수학처럼 음표와 박자를 공식에 대입해 정확하게 계산해내야 했다.

바흐가 어떤 느낌의 곡을 지었고, 헨델의 음악은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작곡가들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도 제대로 들어보지 못했던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을 머릿속으로 욱여넣어야 했고, 시험을 통해 암기한 내용을 평가받아야 했다.

과연 그 시대의 음악교육은 감성을 자극시키는 예술교육이었을까? 음악을 귀로 듣거나 가슴으로 배우지 못해서 인지 음악치유가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음악을 치유 프로그램에 활용하고 있지만 클래식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방학 때만 되면 전국의 수많은 공연장에서 펼쳐지는 해설이 있는 청소년 음악회 또한 주입식 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생한 연주를 통해 교과서에서 배운 곡들을 실제로 들을 수 있어 예전이 비해 상당히 발전했다고 할 수는 있으나 뒤이어 덧붙이는 해설은 여전히 음악을 박제화된 암기과목으로 취급한다. 작곡가를 소개하고, 곡이 만들어진 배경과 뒷이야기를 풀어놓는데, 그 이야기들은 음악해설서에 나와 있는 딱딱한 내용 그대로다.

그런 음악회는 가슴의 떨림과 울림, 교감이 없는 판에 박힌 지식을 전달하는 음악수업의 연장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음악을 포함해 모든 예술이 가슴속에 잠들어 있는 자신만의 느낌과 감정을 깨우는 일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

감성과 창의성을 중요시하는 이 시대에도 음악은 머리로 이해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음악을 통해 다양한 느낌과 감정을 알아차리고, 느낌과 감정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최근 음악치유가로서 활동을 하면서 감동적인 곡을 듣고도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만난다. 다른 사람들은 음악을 듣고 행복과 기쁨을 느끼거나 전율하면서 황홀함에 젖어들기도 하는데 유독 몇몇 사람들은 좋은 기분을 느끼지 못한다.

처음에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서툴러서 그럴 수 있겠다 싶어 기분이 어떤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면 음악을 듣기 전과 큰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다른 곡을 들려줘도 마찬가지다. 잔잔한 곡이든 템포가 빠른 곡이든 어떤 음악을 들어도 감정의 진폭이 거의 없다.

기분에 변화가 없고 감정의 흐름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삶을 변화시킬 에너지가 없다는 뜻이다. 좋은 기분을 느끼고 긍정적인 감정에 빠져들지 못한다는 것은 몸과 마음, 영혼의 생명력이 고갈됐다는 의미다. 흔한 말로 무기력하다는 것이다.

표정이나 행동이 아무리 밝아 보여도 외부의 자극이나 의식의 변화를 통해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이면에는 무력감이 깊이 도사리고 있다는 증거다. 무력감은 만성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어 조심해야 하지만 무력감을 느낄 때 삶을 도약시킬 에너지가 완전히 차단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력감이 아닌 생동감을 느낄 수 있도록 그래서 에너지가 충만하게 차오를 수 있도록 감각의 촉수를 예민하게 가꿔야 한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삶의 소소한 일들에 더 자주 감동하고 더 많이 감탄하며 찬미해야 한다.

요즘처럼 봄꽃이 화려할 때 무감각하게 지나치지 말고 향기에 취하고 흐트러진 자태에 빠져 잠시라도 감동하고 감탄해보길 바란다. 그렇게 느낌과 감정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좋은 기분을 깨우는 것은 감성과 직관, 영감 등의 창조성을 깊어지게 하는 것은 물론 평범한 삶을 기적으로 채우는 출발점이다.

우리가 바라는 풍요와 건강, 행복은 좋은 느낌과 긍정적인 감정을 찾는데서 시작된다. 음악을 비롯한 예술교육이 중요한 이유다. ‘아리오소로 알려진 바흐의 곡을 들으며 찬란한 봄날의 아름다움을 가득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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