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이면 속초 영랑호 둘레길이 흐드러지게 핀 벚꽃으로 장관을 이룰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뉴스 화면에 비춰진 영랑호의 모습은 벚꽃 저편으로 꽃비가 아닌 잿비가 흩날리고, 거대한 불똥이 여기저기 튀어 속초를 재앙의 도시로 만들고 있었다.

4월 4일 밤 속초와 고성은 아수라장 그 자체였고, 우리는 TV화면을 통해 생지옥을 보고 있었다.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에서 본 장면의 데자뷰가 따로 없었으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똥은 영화 ‘혈의 누’의 핏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가혹한 것이었다.

속초는 해마다 수천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대한민국 유수의 관광도시다. 인구 8만 명 남짓의 작은 도시이지만, 푸른 동해바다와 설악산이라는 천혜의 자연환경에 바다의 먹거리를 장착하고 미세먼지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이라는 이점을 살려 오늘의 관광도시를 만든 것이다. 그런 속초가 산불이라는 자연재해를 만나 큰 시름에 빠졌다.

필자의 지인 중에도 그러한 시름에 빠진 사람이 한 명 있다. 고성이 직장인 그는 지난 2년 동안 주말부부로 서울과 고성을 왕래했지만, 천혜의 자연환경을 지닌 곳에서 가족들과 전원생활을 즐기겠다며 꼭 한 달 전에 고성으로 이사를 했다. 부인도 이사에 맞춰 직장을 얻었으며, 두 자녀도 신학기에 맞춰 초등학교 새 학년으로 각각 진급했다.

다락방이 있는 멋진 전원주택에 강아지 두 마리를 키우며, 텃밭에는 상추를 심어 가꾸는 이상적인 전원생활을 막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꼭 한 달 만에 그 가족은 집도 절도 없는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집은 벽돌만 남긴 채 폐허로 변했으며, 가재도구는 하나도 챙기지 못했고, 입고 있는 옷이 전부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두 마리의 강아지만 차에 싣고 나온 그들은 강아지를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당초 분양받았던 집에 강아지를 되돌려 주었다.

불길이 잡히고 날이 밝자 화마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다. 많은 분들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으며, 죽음의 문턱에서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생각지 못한 재해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며,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다. 우선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속초, 고성 등 이번 산불로 큰 피해를 본 지역에 대해,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 제60조에 의거하여 특별재난지역을 신속하게 선포해야 한다. 이미 이 지역들은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필수다.

그 다음이 진정한 정치의 역할이다. 우리는 속초와 고성에서 산불이 도시를 집어삼키고 있는 시각에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방을 목도했다. 국회는 여야당이 격하게 싸우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싸움이 모든 상황에 우선할 수는 없다. 특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보다 우선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유한국당은 국가재난관리를 총괄해야 하는 청와대 안보실장을 밤늦은 시간까지 붙잡아 놓았으며, 안보실장을 보내주자는 여당의 호소는 야당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속초, 고성을 지역구로 하고 있는 야당 국회의원은 그러한 상황에서 지역주민의 편에 선 것이 아니라 정쟁의 편에 섰다. 초선의원이라고 이해해주기에는 그의 정치력은 너무나 초라했다.

이러한 민망한 일이 벌어진 이유는 우리 정치권에 국가재난관리에 대응하는 매뉴얼이 없기 때문이다. 여야가 협의해서 만들어 놓은 매뉴얼이 있었다면, 안보실장을 잡아놓을 이유도 정쟁을 지켜볼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재난을 예방할 수 없다면,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이번 재난을 계기로 여야가 머리를 맞대어 합의한 국가재난극복 매뉴얼의 탄생을 기대해본다.

<이경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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