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대선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절대 유리한 환경이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의 여러 비리 의혹으로 정권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김대중 정권 후계로 내세운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승리했다. 

이회창 후보는 훗날 회고록에서 “유권자 중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층, 이른바 중도층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나는 이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선거는 설득인데 그 능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미지에서도 노무현 후보 측이 내세운 귀족과 서민, 기득권과 개혁세력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 나의 이미지를 바꾸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기득 세력의 대표주자라는 이미지가 굳어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가 안철수 무소속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면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에게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선거라는 게 당시 문재인 캠프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박 후보는 선거 막판 회심의 카드로 승부수를 걸었다. 기존의 강고한 보수층을 기반으로 중도층을 확보하기 위해 누리예산(0-5세 보육을 국가에서 책임짐)과 대학등록금 반액제, 그리고 노인수당(노령기초연금, 65세이후 모든 노인들에게 20만 원 무조건 지급)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한국정치판 최초의 ‘생애주기적 복지개념’이었다. 이는 진보적 경쟁상대인 민주통합당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수구적 정치집단으로만 생각했던 새누리당의 공약이라고 믿기에는 놀라운 내용이었다. 

결국 박 후보는 중도층의 표심을 얻는데 성공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당선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이렇게 이회창 박근혜 문재인 모두 중도층 때문에 울고 웃었던 게다. 
우리 국민들의 이념분포는 대체로 진보 30, 보수 30, 중도 40이라는 게 정설이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성향은 크게 변하지 않지만, 결국 중도개혁세력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가 승패의 관건이다. 중도층에 어느 진영이 더 어필하느냐에 대권의 향방이 결정된다는 말이다.

요즘 황교안 한국당 대표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와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가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이회창 전 총재와 마찬가지로 황 대표는 현실정치 등단 후 연일 우경화 발언을 쏟아내고 우경화 세계관을 드러내 탄핵정국으로 분열된 보수층을 결집시키는 데는 일단 성공하고 있는 듯 보인다. 당 지지율이 회복세로 들면서 표정도 한결 여유 있어 보인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는 문재인 정부가 국정 전반에서 낙제점을 받으면서 반사이익을 얻고 있는 측면이 짙다. 또 황 대표 말고 딱히 보수진영이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당 대표 취임 후의 인사 스타일도 황 대표는 이 전 총재의 방식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듯싶다. 
이 전 총재가 당권을 쥐었을 때 당내 기반은 사실상 전무했다. 대법관, 감사원장, 총리 등을 역임한 탓에 그의 주위에는 오로지 관료들만 포진하고 있었다. 그가 측근정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다. 

검사, 법무장관, 총리 출신인 황 대표 역시 당내 기반 없이 당권을 잡았다. 자신과 가까운 검사를 비롯한 관료들만 그를 에워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신을 지지하는 당내 특정 계파 인사들을 주요 당직에 앉힐 수밖에 없게 된다. 

게다가 이번 4.3 보궐선거에서는 공안통 직계 후배 검사인 정점식 변호사를 통영·고성에 공천하는 인사 폐쇄성을 드러냈다. 통영·고성은 지난 총선에 한국당 후보가 무투표로 당선될 만큼 한국당이 절대 우세한 지역이다. 그런데도 황 대표는 한국당 세가 배로 강한 통영이 아닌 고성 출신의 정 후보를 공천하는 바람에 선거판세를 스스로 힘이 들게 만들었다는 지적이 선거기간 내 일었다.

따라서 황 대표가 앞으로 갈라진 보수와 중도층까지 지지 세력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당내 기반을 공고히 다지려면 강경 태극기 세력·특정계파 관료 출신 등의 지지세에만 의존하는 폐쇄성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자신의 체제가 도전받고 이 전 총재의 실패를 답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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