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49]
삼 불 망(三不忘) - [49]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9-04-08 13:46
  • 승인 2019.04.08 13:53
  • 호수 1301
  • 54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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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다음 날 이른 아침, 내시들은 비를 들고 새벽녘에 궁궐 안에 내린 눈을 쓸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이것이 무엇인가?”
“감히, 누가 이걸 붙여 놓았지?”
“이건 익명서가 아닌가?”
“그래, 이건 대비마마를 지칭하는 글이 틀림없어.”
“말세야, 말세!”
“목이 두 개가 아니라면 말조심하게,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
덕녕공주와 강윤충 사이의 음란한 관계를 고발하는 익명서였다. 이것은 연적(戀敵) 관계에 있던 배전이 자기 심복을 시켜 마치 개혁세력인 성리학자들이 방을 붙인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강윤충이 탄핵을 받게 되면 자신이 덕녕공주를 독차지할 수 있을뿐더러 성리학자들이 퇴조하게 되면 조정에서의 자신의 위치가 더욱 확고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그야말로 양수겸장(兩手兼將)의 모략이었던 것이다. 
소문은 나는 화살처럼 빨랐다. 대궐 참새들의 입방아는 이 엄청난 사건을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대비마마, 대비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무슨 일인데 이리 소란을 피우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말을 해보아라.”
“오늘 새벽 승평문에 익명서가 나붙었사온데…….”
“무슨 내용이더냐.”
“익명서에…….”
“답답하구나, 익명서에 무슨 말이 적혔단 말이냐?”
사태를 눈치 챈 덕녕공주는 심각한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익명서에 대비마마와 강윤충 대감의 일이 적혀 있었다 하옵니다.”
“아니, 무엇이야?”
덕녕공주는 치미는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었다.
희대의 간통사건은 화제가 되어 온 장안이 떠들썩하게 되었다. 

권력을 농단한 강윤충을 탄핵하다

익명서 사건이 발생한 며칠 후였다.
김륜, 이제현, 박충좌가 남대가에 있는 술청에 모였다. 이들은 평소 덕녕공주의 섭정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터라 이날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 있었다. 찬성사 안축은 병상에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먼저 박충좌가 말을 꺼냈다.
“오늘 죽헌(竹軒, 김륜의 호) 대감과 익재를 이렇게 뵙자고 한 것은 다름 아니라 ‘익명서 사건’에서도 거론되었던 강윤충의 난행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입니다.” 
그러자 김륜이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강윤충은 덕녕공주의 총애를 받고 영화를 누리고 있으며 그 횡포가 도에 지나치네. 정방의 제조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하여 많은 뇌물을 받고 있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네.”
이제현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담담하게 말했다.
“인사 권력을 농단하고 있는 강윤충을 탄핵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강윤충은 영귀(榮貴)를 탐하여 백가지로 욕심을 부리는 흉악한 자입니다. 이런 내용을 담아 치암(박충좌의 호)이 초안을 잡아 상소를 올리고 죽헌 대감과 내가 힘을 보태는 방법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월 초. 충목왕과 덕녕공주가 김륜을 불러 충혜왕의 시호를 청할 일을 물으니 김륜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선왕(충혜왕)께서 이국땅에서 돌아가신 것은 간사한 소인배들을 가까이하심으로써 원망을 사고 덕을 더럽혔던 까닭이옵니다. 그 화근의 우두머리인 강윤충이 아직 살아있습니다. 먼저 그의 죄를 바로잡아 선왕의 잘못이 아님을 밝히신 뒤에라야 시호를 청할 수 있사옵니다.”
며칠 후, 김륜, 이제현, 박충좌 등의 원로들이 함께 연명으로 상소문을 올렸다.
맹자가 말하기를 “불인(不仁)한 자와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사옵니다. 만약 임금과 백성을 기만하고 천하의 법도와 공론도 두렵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다면 이는 불인한 자 중에서 크게 불인한 자이니 이런 자와는 서로 말도 할 수 없거늘 어찌 그를 믿고 일을 맡길 수 있겠사옵니까?
신들이 보건대, 강윤충은 천예(賤隸) 출신으로 선왕의 총애를 받아 정방제조가 되어 전선(銓選, 전형하여 선발함)의 권한을 제 손에 쥐고 벼슬을 주고 빼앗는 것을 제 마음대로 하면서 공공연히 뇌물을 받아 문전이 저잣거리처럼 되었사옵니다. 그는 본처가 있는 데도 아직 상복도 벗지 못한 고인(故人) 조석견의 처 장 씨에게 장가들어 조석견의 유산을 빼앗았습니다. 선왕께서 조옥(詔獄)으로 붙들려 가시어 악양(岳陽)으로부터 반장(反葬)하여 오게 된 원인은 강윤충이 원흉이며, 민환 이외의 9명은 한낱 졸도(卒徒)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강윤충이 나라의 정권을 농단하여 만백성에게 해독을 끼쳤고 심지어는 선왕으로 하여금 살아서는 견책을 받고 죽어서는 시호도 제때에 올리지 못하게 하였사옵니다. 만약에 이놈의 죄악을 규정치 않는다면 원나라에 대한 선왕의 충성을 구명할 수 없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상국(上國)에 보고하시어 전대의 일이 선왕의 과오가 아니라 모두 강윤충의 소위(所爲)임을 밝히시고, 이 도둑을 베어 선왕의 만세의 수치를 씻으시옵소서.

이들의 주청에 용기를 얻은 대소신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강윤충을 삭탈관직하고 그 죄를 물어야 하옵니다.”
“강윤충을 속히 외방에 내쳐야 하옵니다.”
종친들도, 중신들도 입이 있는 자는 모두 한결같이 강윤충의 부처를 아뢰었다. 
연명의 상소문과 신하들의 간언을 발 뒤에서 들은 덕녕공주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사지가 벌벌 떨리는 전율감에 몸서리쳤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정부(情夫)를 내쳐야 하는 비운의 여인이 되었다. 업보였던 것이다. 
덕녕공주는 부르르 떨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교지를 내렸다.
“그런 소문이 세상에 떠돌다니 부끄러운 일이오. 모두의 뜻이 그렇다 하니, 내가 마지못해 따를 수밖에 없소. 강윤충을 경상도 영해 땅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라.”
“망극하옵니다. 대비마마.”
강윤충은 노비 출신으로 유일하게 대비와 간통한 기록을 역사에 남겼다. 무소불위의 권세를 자랑하며 밤마다 대비를 차지했던 간신은 결국 탄핵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귀양 가게 되었다.
김륜, 이제현, 박충좌는 다시 원 황제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작성하여 충목왕과 덕녕공주에게 올렸다.
성무황제(칭기즈칸)가 북방에서 건국할 때에 충헌왕(고종)이 누구보다도 먼저 자진하여 복종하였고, 세조황제(쿠빌라이)가 강남에서 회군할 때 충경왕(원종)이 험난을 무릅쓰고 친히 입조(入朝)하였사옵니다. 그리하여 자손 대대로 인척관계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강윤충은 보잘 것 없는 소인으로서 나라의 권세를 독점하고 백성에게 해독을 끼친 나머지 선왕을 견책 받게 한 결과 시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억울한 사정을 자세히 살피어 저승에 있는 선왕의 원한을 풀어주시기 바라옵니다.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지은 안축도 영면하다

그해 6월 21일이었다. 
장맛비는 한 달 동안 계속 내렸다. 큰 폭우로 송악산이 허물어지는 변괴가 일어났고 냇물이 넘쳐 인가를 덮쳐 그 피해가 막심했다. 민심은 뒤숭숭하였다. 이제현은 장대처럼 마당에 쏟아지는 장맛비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세찬 빗줄기를 뚫고 흥령군 안축이 사망했다는 부음이 전해졌다. 안축의 나이 향년 62세였다.
달포 전. 이제현은 안축이 앓아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원나라에서 돌아온 이곡과 함께 문병을 갔었는데, 마침 안축의 아우 안보(安輔)도 문병 와 있었다.
안축은 그 아들 종원(宗源)을 가리키면서 이곡에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네. 자네(이곡)가 만일 나를 생각한다면 우리 아들을 잊지 말게.” 
안축은 또 이곡에게 묘지명을 부탁하면서 말했다.
“내 평생에 아무 것도 자랑할 만한 것이 없네. 내가 네 번이나 전법판서(典法判書, 법률, 감옥을 다스리는 정3품)가 되어 무릇 백성들이 강제로 노비가 된 것을 반듯이 다스려 양인이 되게 한 것은 기억할 만한 일이네.” 
이곡이 이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말했다.
“병은 곧 낫지 않겠습니까. 말씀이 어찌 이렇게 급하십니까.”
안축은 ‘왕이 근심을 당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고 왕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 도리다. 우리들이 배운 것은 이러하다’라며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될 당시 왕을 옹호했던 충신이다. 그는 자신의 천명을 안 군자였던 것이다.
이곡은 안축의 묘지명을 이렇게 썼다.

장수하지 아니했다 하랴, 나이가 7순에 가까웠고, 
귀하지 아니 했다 하랴, 지위가 여러 봉군 중의 으뜸이었네. 
아우 있고 자식이 있으며, 덕도 있고 칭찬도 있으니, 
나의 묘지명의 글이 과장이 아니라 공의 봉분 그대로네.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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