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엔 도토리 네 개, 저녁에는 세 개로 바꿔 보자꾸나. 그러면 저녁보다 아침에 한 개를 더 먹게 되니까 훨씬 좋지?” 춘추전국시대 송(宋)나라 땅에 살던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어 우리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조삼모사(朝三暮四)” 라는 고사다.

최근 들어 정치인이나 행정가들이 “국민의 눈높이가 높아져서 맞추기가 쉽지 않다”라는 말을 부쩍 많이 하곤 한다. 온 국민이 스마트폰 달인인 시대에 ‘정보의 등가성’으로 인한 정보격차 해소 및 높은 지적 수준에 따른 ‘견제와 균형’ 기능이 높아짐에 따른 현실적 고충(?)을 털어놓는 것일 게다.

‘국민의 눈높이’는 “법률”이라는 최고 높은 단계의 제도로 정착되고 ‘국민감정’이라는 일반 상식적인 모습으로 표출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들의 행동에서마저 ‘국민의 눈높이’ 앞에 스스로 경계함과 저어함이 있을까.

주식투자, 그야말로 ‘자본주의의 동력이자 꽃’이라 할 수 있다. 누가 투자 그 자체를 잘못된 행위이자 불법이라고 비난하는가. 또한 지극히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범위 내의 수단과 방법이라면 그 누가 ‘창조적 투자’를 통한 부의 축적을 감히 욕하겠는가. 자산 가운데 주식의 비중이 높다고 누가 비난을 하는 것인가.

민간기업 최고경영자 출신으로서 주식투자에 누구보다 많은 경험이 있는 필자로서도 직간접으로 접하는 수많은 유혹 앞에 흔들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나만의 개똥철학’이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명예’를 되새김질 하곤 했다. 때로는 고수익을 눈앞에 두고도 혹시 있을지도 모를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엄청난 꿀단지를 ‘그림의 떡’으로 묵히기도 했다. 청와대 내부 인사검증을 거치면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혹시라도 뭔가 잘못 살아오거나 오해를 살 만한 일은 없던가?”하는 생각에 나 자신이 걸어온 길 전체에 대해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아쉬움과 회한에 쌓이기도 했다.

하물며 불과 2년 전에 무시무시한 최고 권력인 대통령이라는 자리도 ‘탄핵’시켰던 권력의 정점에 있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이라는 자리에 임명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어떠해야 하는가. 과연 그 자리에 앉을 사람에 대해 기대하는 ‘국민의 눈높이’는 어떠하겠는가. “전적으로 남편이 행한 행위라서 자신은 잘 모른다.”는 이미선 후보자의 말 저편에 “묵시적 경제공동체”라는 말이 오버랩되는 것은 나만의 과민함일까. 법률과 일반인의 법감정에 따른 소위 ‘합리적 의심’이라는 것은 깨끗하게 잊은 모양이다.

“헌법재판관이 되면 즉시 전량을 매도하겠다.”라고 하니 “그러면 괜찮다”는 의원도 있다. 그렇다면 헌법재판관 자리도 얻고 고수익도 고스란히 얻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을 당연시하면서 일반 국민들이 괜찮다고 박수라도 치길 기대하는 것인가. 사면 오르고 팔면 떨어지는 ‘마이다스의 손’에 가까운 투자행태라고 수많은 증거를 들며 연일 언론보도가 흘러나오는 데도 “불법은 없었다.”라는 한마디면 국민들이 곧이곧대로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우리 국민들 가운데 주식투자에 있어서만큼은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단 말인가.

이러고도 국민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고 결정한다는 말이 진정 ‘국민의 눈높이’를 두려워하는 위정자의 태도인가. 한술 더 떠서 “최정호 후보자의 ‘다주택’ 부동산 투기와는 달라 임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논리는 어디서 끌어온 비교법인가. “오얏나무 밑에서는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던 성현의 진리 앞에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오늘이다.

‘두려운 국민의 눈높이’라고 그들이 즐겨 쓰는 수사(修辭) 앞에 국민을 ‘개돼지’로 비유했던 어떤 공직자의 발언이 낯설지 않은 것은 왜일까. <서원대학교 교수/前 대통령직속 청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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