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동경한 하늘로 영원한 비행 떠났다”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구 소재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지난 12일 서울 서대문구 소재 신촌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빈소가 마련돼 있다.

[일요서울|김별 기자]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지난 8일(한국시간) 새벽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숙환인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수송보국(輸送報國)’의 일념으로 평생을 항공산업에 종사한 조 회장의 갑작스런 죽음에 각계각층에서 애도가 이어졌다. 고인을 보내기도 전, 재계에서는 한진그룹 경영권의 향배에 관심이 집중됐다. 차기 경영 주자로 우선 거론 중인 인물은 2016년 대한항공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조원태 사장이다. 그러나 조 회장의 사내이사 연임 부결 등 지난해부터 그룹 내에서 문제가 불거졌고, 조 회장이 갑작스럽게 별세하면서 승계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점이 한진그룹 3세 경영 승계 과제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대한항공 “조 회장, 글로벌 항공사로 회사 성장시켜”
‘스카이팀’ 창설 주도…선제적 투자로 경영 위기 돌파

조양호 회장은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뒤 45년간 정비, 자재, 기획, IT, 영업 등 항공 업무에 필요한 실무 분야들을 두루 거쳤다. 이후 조 회장은 1992년 대한항공 사장, 1999년 대한항공 회장, 2003년 한진그룹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조 회장이 대한항공에서 화려한 일만 겪은 것은 아니다. 회사의 존폐를 흔드는 위기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 회장은 세계 항공업계 무한 경쟁의 서막을 항공동맹체인 ‘스카이팀(SkyTeam)’ 창설을 주도해 맞섰고 전 세계 항공사들이 경영 위기로 움츠릴 때 선제적 투자로 위기를 돌파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자체 소유 항공기 매각 후 재임차를 통해 유동성 위기를 극복했고, 외환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1998년에는 유리한 조건으로 보잉737 항공기 27대를 구매했다.

이라크 전쟁뿐만 아니라 9.11 테러의 여파가 남아 있어 항공 산업이 침체의 늪에 빠졌던 2003년에는 차세대 항공기인 A380 등을 구매 계약했다. 이 항공기들은 대한항공 성장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어 조 회장은 대형항공사와 저비용 항공사(LCC) 간 경쟁 패러다임을 흡수해 2008년 7월 진에어(Jin Air)를 창립했다. 진에어는 한국 항공 시장의 저비용 항공 신규 수요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대한항공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1969년 출범 당시 8대뿐이던 항공기는 166대로 증가했고 일본 3개 도시만을 취항하던 국제선 노선은 43개국 111개 도시로 확대됐다. 대한항공 측은 “조 회장은 재직 기간 중 대한항공을 글로벌 선도 항공사로 거듭나게 했다”고 평가했다.

차기 총수에 관심 집중

갑작스러운 조 회장의 별세로 한진그룹을 이끌 차기 총수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이다. 재계는 현재 조원태 한진칼 사장이 삼남매(조현아·조원태·조현민) 중 유일하게 한진칼 사내이사로 등재돼 있어 차기 한진그룹 총수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조 사장이 그룹 경영권을 승계할 확률이 높지만, 지주사 한진칼에 대한 오너가(家)의 지분율이 낮다는 점은 문제로 거론된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지난 1월 2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지난 1월 2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시무식에서 신년사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진그룹은 지주사인 한진칼을 중심으로 한진칼→대한항공·한진→진에어 등 계열사로 이어지는 지배 구조를 갖고 있다. 한진칼의 개인 최대 주주는 17.84%를 보유 중인 조양호 회장이며 이어 조원태 사장(2.34%),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2.31%),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2.30%) 순이다.

지난 11일 기업 경영성과 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지난해 말 현재 한진그룹의 한진칼 주식담보 현황을 조사한 결과, 조 회장과 특수관계인 등이 한진칼 총 보유지분 28.93% 중 27%에 해당하는 7.75%를 금융권 및 국세청에 담보로 제공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중 한진칼 지분 2.34%를 가진 조 사장은 보유 주식(138만5295만주)의 42.3%에 달하는 58만6319주를 금융권 및 세무서 담보로 제공했다. 조현아 전 부사장과 조현민 전 전무도 각각 보유 주식의 46.8%, 30%에 해당하는 주식을 금융권과 국세청 등에 담보로 제공한 상태다.

17.84%로 가장 많은 한진칼 지분을 보유한 조 회장도 보유주식의 23.7%를 이미 하나은행과 종로세무서 등에 담보로 제공했다. 조 회장은 지난해 5월 불거졌던 상속세 논란 속에서 보유 중인 한진칼 지분 1.69%에 해당하는 100만 주를 종로세무서에 담보로 했다. 이어 지난해 11월에는 2.54%에 달하는 150만 주를 담보로 해 KEB하나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은 바 있다.

지배구조의 핵심인 한진칼 지분을 조 사장이 2.34%밖에 보유하지 않은 점은 승계에 서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 사장이 그룹 경영권을 갖기 위해서는 조 회장의 지분 17.84%를 상속받아야 한다. 현재 승계를 위한 상속세 마련 방안으로 한진칼을 제외한 정석기업 등 기타 계열사의 지분 매각, 한진칼 또는 대한항공의 배당여력 확대, 퇴직금 활용과 더불어 상속 주식과 보유 주식을 담보로 하는 주식담보대출이 거론되고 있다.

막대한 상속세 어쩌나

조 사장이 그룹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조 회장의 지분을 상속받을 경우 ‘막대한 상속세’라는 산을 넘어야 한다. 조 회장이 보유한 한진그룹 상장 계열사의 주식 가치는 약 3600억 원으로 단순 상속세율 50%를 적용해도 세금만 18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영권을 상속받을 경우 주식 가치의 30%를 가산하게 돼 있어 최종 상속세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상속세를 해결한다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분 상속 시 세금을 내고 나면 현재 한진 그룹이 가진 지분이 크게 줄어들 수 있다. 이 경우 한진칼 2대 주주인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그레이스 홀딩스) 지분(13.47%), 국민연금 지분(6.64%) 등과 비교할 때 경영권 자체가 위협받을 가능성이 높다. KCGI는 지난 4일 공시를 통해 “한진칼 지분을 추가 취득해 기존 12.68%인 보유 지분율을 13.47%로 높일 예정”이라고 밝히는 등 한진그룹에 대한 경영권 공세를 이어갈 것을 예고했다.

당장 다음 달 1일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는 ‘2019년 대기업집단 지정’ 현황을 발표해야 한다. 자산 총액 5조 원 이상 공시 대상기업집단과 자산 총액 10조 원 이상인 기업을 가리키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을 확정하는 작업이다. 이때 동일인(총수)이 누군지 정해야 한다. 동일인이 정해지지 않으면 대기업집단 지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한진그룹의 내부 결정을 지켜봐야 하는 입장이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지난 9일 공정위의 동일인 지정 문제에 대해 “장례 진행 준비가 시급하기 때문에 다음 주가 돼야 정확한 진행 방향이 나올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한진그룹은 주요 계열사 사장단을 중심으로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다. 조원태 대한항공 총괄사장, 석태수 대한항공 부회장(한진칼 사장), 우기홍 대한항공 부사장, 서용원 (주)한진 사장, 원종승 정석기업 사장 등이 한진그룹 3세 경영이 안정권을 찾을 때까지 그룹 현안을 논의하게 됐다. 경영 공백 최소화와 함께 조 회장의 장례 절차로 인해 오너 일가가 경영에 집중하기 힘들다는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룹, 비상경영체제 돌입

대한항공에 따르면 조 사장은 오는 6월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연차 총회 의장직을 맡을 예정이다. IATA는 항공업계의 국제연합(UN)으로 불린다. 총회에서 조 사장은 ‘포스트 조양호 체제’ 공식화를 알릴 것으로 예상된다.

2003년 한진정보통신 영업기획차장으로 그룹에 참여한 조 사장은 이듬해 대한항공 경영기획팀 부팀장으로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이후 대한한공 여객사업본부장 상무, 경영전략본부장 전무와 부사장을 거친 뒤 2017년 1월부터 대한항공 사장직에 임명됐다.

조양호 회장의 경우 부친이자 그룹 창립자인 조중훈 회장이 2002년 세상을 떠난 다음 해 2대 회장직에 올랐다.

한편 보수야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별세를 두고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라는 주장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지난 9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총수 일가를 둘러싼 많은 사회적 논란과 지탄도 있지만 적어도 대한민국 항공물류산업 발달에 조 회장이 기여한 바가 많은 것도 사실”이라며 “문 정권 하 기업의 수난사를 익히 잘 아실 것이다. 국민 노후자금을 앞세워 경영권까지 박탈하고 연금사회주의라는 무거운 비판에도 아랑곳 않고 기업통제, 경영개입, 기업인 축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무성 자유한국당 의원도 이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토론, 미래’ 토론회에 참석해 “조양호 회장이 원래 지병이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가 압수수색을 18번씩이나 하는 과도한 괴롭힘이 고인을 빨리 돌아가시게 만들었다”며 “대한항공 회장으로 재직한 20년 동안 사세를 3배로 키운 능력 있는 사람이었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장을 맡아 지구를 16바퀴나 도는 강행군을 펼쳐 조직위원장으로서 업적이 큰데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조 회장의 이사 재선임을 저지해 결국 조 회장을 빨리 죽게 만든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0일 자유한국당이 각종 현안에 대해 막말과 가짜뉴스를 쏟아내고 있다며 “망언을 중단하라”고 대응했다.

이해찬 대표는 이날 오전 대구에서 열린 대구 현장최고위원회의 및 예산정책간담회에서 “한국당 의원들이 도를 넘는 망언을 거듭하고 있다”며 “5.18 망언에서 시작하더니 어제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별세를 정부의 간접살인이라 왜곡하고 강원 산불도 세월호 참사에 빗대는 허위 조작 정보를 퍼뜨리고 있다”고 말했다. 

30·40대 경영 승계 사례는?

대기업 총수 중 젊은 나이에 경영권을 승계한 인물이 있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해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별세로 구광모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구광모 회장은 1978년생으로 1975년생인 조원태 사장과 세 살 차이다.

현재 대기업 총수 중 가장 젊은 나이에 경영권을 승계한 인물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다. 그는 1981년 한국화약그룹(현 한화그룹) 설립자인 고 김종희 전 회장이 타계하자 29세의 나이로 회장직에 올랐다. 김 회장은 1977년 태평양건설(현 한화건설) 해외수주담당 이사로 입사했고 이듬해 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한국화약그룹 관리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년 후 그룹 회장에 오른 이력이 있다. 올해로 39년째 회장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최장수’ 회장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 등은 30대에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40대에 총수직에 오른 인물로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조현준 효성그룹 회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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