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피해 생존자 중 한 사람”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피해자와 진선미 의원 [뉴시스]
형제복지원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피해자와 진선미 의원 [뉴시스]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지난해 11월 20일 문무일 검찰총장이 군사정권 시절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례로 꼽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비상상고했다.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확정 판결 이후 29년 만에 이뤄진 조치다.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때로부터는 31년 만이다.

비상상고는 형사소송의 확정 판결에 법령의 적용이 잘못됐다고 판단되는 경우 검찰총장이 대법원에 시정을 청구할 수 있는 일종의 비상구제 제도다. 원칙적으로 대법원은 비상상고의 적법성 등 요건을 따져보고 문제가 없으면 심리를 진행, 기각 또는 파기하거나 직접 다시 재판할 수 있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은 과연 언제쯤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까.

 

10살‧9살이던 형제, 경찰서에서 형제복지원으로 넘겨져
형은 보육원 도망쳐 소매치기 생활, 지금은 교도소에

 

형제복지원 사건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이유로 선량한 시민을 불법 감금, 강제노역과 구타, 학대, 암매장, 성폭행 등을 자행해 1975년부터 1987년 폐쇄될 때까지 12년간 복지원 자체 기록으로만 513명이 사망했다. 피해자는 3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망자들의 주검 일부는 의대에 팔려나가 시신조차 찾지 못해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리고 있다.

19대 국회에서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피해자를 지원하는 내용의 특별법이 발의됐으나 폐기됐다. 20대 국회에서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을 규정한 과거사 규명법(과거사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안이 발의됐으나 여야 입장 차로 인해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발목이 잡혀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달 29일 부산시의회에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신고센터인 ‘뚜벅뚜벅’을 지원하고 피해자 명예회복 등 진상규명을 위한 자료 조사를 가능케 하는 ‘부산광역시 형제복지원 사건 피해자 명예회복 및 지원에 관한 조례’가 제정했다. 진실규명을 위한 첫발을 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요서울은 지난해 12월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임을 밝힌 한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그동안 공개하지 못했던 편지 내용을 진실규명의 염원을 담아 재구성해 공개한다.

 

복지원에서

성폭력‧일반 폭력 목격

 

1985년 3월 10일 부산에 살던 10살 차태원(가명)군은 한 살 어린 동생 차태영(가명)군과 버스를 탔다. 근처에 사는 고모네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두 형제는 버스 안에서 잠이 드는 바람에 종점까지 가서야 눈을 떴다. 이미 목적지를 지나쳐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던 형제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결국 이들은 집도 부모님도 찾지 못한 채 사상파출소를 거쳐 형제복지원으로 보내졌다. 당시만 해도 형제는 그곳에서 어떤 일들을 겪게 될지 알지 못한 채였다.

두 형제는 결국 형제복지원에서 2년1개월여를 보낸 뒤인 1987년 4월 11일 지역의 한 아동복지원으로 전원됐다. 하지만 두 형제는 이후 성인이 될 때까지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형인 태원 씨가 복지원에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당시 태원 씨는 동생과 함께 도망치기로 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두 형제가 형제복지원에서 지낸 시간은 2년1개월여에 불과하지만 이들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태원 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그곳에서 2년1개월간 생활관과 화장실 등에서 보았던 성관계는 성폭력이었고 들것과 비닐마대로 옮겨지던 사람들은 무지비한 폭력 등으로 망인 되신 분들이었다는 것이고, 그때의 일들이 무슨 일이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을 만큼 성장했을 때 받았을 그 충격, 저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편지에 적었다.

형제복지원 출신에 보육원을 전전했던 차씨 형제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을 수 없던 무적자 신분이다 보니 직장 생활을 하기도 어려웠다.

태원 씨는 “10~13세 사이 너무 굶주려서 슈퍼에서 훔친 봉지라면을 빗물에 불려서도 먹고 비 내리는 밤을 추위에 떨며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밤을 지새운 날들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경찰‧공무원이

제 역할 했더라면

 

태원 씨는 결국 14살 때부터 소매치기가 됐다. 그는 그것이 그의 첫 번째 사회생활이자 돈벌이였다고 했다. 그는 서울 이태원에 자생하던 소매치기조직에게 맞아가며 소매치기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가족에게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자란 태원 씨는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었다. 44살이 된 태원 씨는 두 번의 자살 시도 경험과 함께 결국 전과자가 돼 지방의 한 교도소에서 3년째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태원 씨는 정부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형제가 길을 잃었을 당시 경찰서에서 신원확인만 제대로 했다면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차씨 형제는 성인이 된 후 모친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모친은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결국 형제는 가족에게 돌아갈 수가 없었다. 태원 씨가 정부를 원망하는 이유는 당시 경찰 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보내졌던 고아원 등에서 차씨 형제는 아동카드를 확인한 적이 있다. 아동카드에는 형제들과 관련된 각종 정보가 기록돼 있다. 그런데 너무나 황당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태원 씨의 아동카드에는 부모가 이혼하고 두 형제를 남겨두고 가출하자 1985년 3월 10일 버스 무임승차로 무작정 시내를 배회하다 순찰 중인 경찰에 단속돼 사상파출소 의뢰로 형제복지원에 보내졌다는 내용이다.

어린 나이에도 당시 고모집에 가고 있다고 밝혔는데 지방을 배회했다니 태원 씨는 관련 내용을 확인하고는 너무나 억울하고 답답했다. 게다가 당시 사상파출소 경찰은 부모와 집주소, 연락처까지 확인하고도 형제를 형제복지원에 넘겼다.

또 이해할 수 없는 점은 형제와 관련된 각종 전원기록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이다. 두 형제는 형제복지원을 나와 지역 아동복지원으로 전원됐는데 복지원에 기록된 날짜와 부산시청에 기록된 날짜가 다르다. 공무원들의 관리감독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다.

복지원 등의 전원 기록은 추후 잃어버린 자녀나 부모 등을 찾을 때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만큼 정확하게 제대로 관리가 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에 태원 씨는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태원 씨가 바라는 것은 정부가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규명과 함께 피해자들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피해보상 등의 조치를 해 주는 것뿐이다. 특히 국회는 의지만 갖는다면 관련 법안을 처리할 수 있는 만큼 적극적인 행동을 해 주길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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