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가(史家)들은 조선시대 최악의 왕으로 선조를 꼽는다. 자신의 치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전시 중에는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에 망명까지 하려고 했다는 게 그가 가장 나쁜 왕으로 지목받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결정적인 순간의 인사 대참사 말이다.

1590년 선조는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을 통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파악토록 했다. 당시 전국시대를 통일한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륙 정벌의 야욕을 품고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다.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兵船)을 준비하고 있어 멀지 않아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에 반해 김성일은 침입할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던 선조는 김성일의 말을 믿고 ‘10만 양병론’을 배척했다. 그 2년 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해왔다.

선조는 또 원균을 충청병사로 임명한 뒤부터 이순신 장군을 불신하기 시작했다. 탐욕스럽고 포악한 원균을 탄핵해야 한다는 사헌부의 끈질긴 요청에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해 원균을 감쌌다. 이러한 원균은 결국 부산포 앞바다에서 해군 사상 가장 처참한 패배를 당하며 전사한 반면, 이순신은 한산도 대첩으로 원균과 대조를 보였다. 선조는 결국 나라가 망할 수도 있는 절박한 위기에 이르자 비로소 이순신에게 수군을 맡겼다. 

선조가 정세 판단력이 부족한 김성일을 통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보내지만 않았더라면, 또 무능력한 원균 대신 이순신을 수군 책임자로 일찌감치 기용했더라면,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인한 참혹한 인명 손실과 피해를 그처럼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조와는 대조적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와 유비는 공명정대, 적재적소의 인사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오랜 부하들을 잘 활용하면서 신인들을 키워 신구세대의 조화와 협력을 이뤄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당시는 서로 먹고 먹히는 전쟁이 항상 일어나는 시대여서 누가 더 나은 인재를 구하고 능력을 발휘토록 하느냐가 흥망의 갈림길이었다. 사람에 대한 욕심이 유난히 대단했던 조조는 순욱(荀彧)이라는 최고의 참모를 처음 만났을 때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을 정도로 그를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인사 대상자에 대한 평가만큼은 아주 엄격히 했고 등용 후에는 신상필벌을 확실히 했다. 

유비는 겸손을 무기로 자신보다 무려 스무 살이나 연하인 제갈공명을 삼고초려(三顧草廬)로 극진히 구애해 군신관계를 이루고 공명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창업 동지와 가신들을 단속했다. 임종을 앞두고는 공명에게 “마속을 유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말대로 마속은 실질보다 말이 앞서서 크게 일을 그르치게 되자 공명은 눈물을 머금고 마속을 처단했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말이 이때 생겼다. 

요즘 문재인 대통령의 인사를 둘러싸고 말들이 많다. 코드인사, 낙하산 인사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코드인사와 낙하산 인사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과거 정권에서도 꾸준히 제기된 사안으로 문제는 인사의 형식이 아니라 수준이다. 국민들 눈높이에 맞지 않고 ‘깜’도 안 되는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고 있으니 문제라는 게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사람만 잘 쓰면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는 뜻이다.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는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으로 발탁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정실인사’라는 비판은 제기되지 않았다. 능력자라면 가족을 기용해도 문제가 없다는 말 아니겠는가. 로버트 케네디는 장관으로 있는 동안 흑인 인권 개선과 조직범죄 진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등 형과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결국 국민 눈높이에 맞고 ‘깜’이 되고도 남았다는 얘기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