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제재가 북 핵 포기 가장 좋은 압박 수단”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일요서울 | 오두환 기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국회를 찾았다. 국회의원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지난 25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김창준정경아카데미 강연을 위해서다. 김창준정경아카데미는 매주 아카데미회원들을 대상으로 정·재계 유명인사들의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미북회담 “완전 결렬 결과 낼 것이라고 생각 못했다”

“김정은에 북 헌법 전문 속 핵보유국 지위 삭제 권유해라”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최근 국가기후환경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문재인 정부가 날로 심각해지는 미세먼지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앞장서 달라며 부탁했다.

지난달 17일 한정우 부대변인은 청와대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달 16일 반 전 총장과 만나 기구 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반 전 총장이 위원장직을 받아들였다고 서면브리핑을 통해 밝힌바 있다. 

당초 ‘미세먼지 범사회적기구’ 구성 제안과 함께 반 위원장을 추천한 것은 바른미래당 손학규 대표였다. 

당시 반 전 총장은 “기후 변화 등 국제 환경문제를 오랫동안 다뤄 온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에 도움이 될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기쁘게 생각한다”고 수락 의사를 밝혔다.

이어 “미세먼지에 관한 국민적 관심이 매우 높지만, 단기간에 해결하긴 어려운 과제여서 본인이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칠까 부담과 걱정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미세먼지 문제는 정파나 이념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범국가기구는 제 정당, 산업계, 시민사회 등까지 폭넓게 포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북한 비핵화 움직임

“커다란 진전 없었다”

 

정경아카데미 회원들을 찾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한반도 정세와 북핵문제’에 대한 얘기를 주제로 강연했다.

먼저 반 전 총장은 지난해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와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거론하면 한반도 상황이 극적으로 반전됐고 평화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전했다. 이후 3번의 남북 정상회담과 1번의 북미정상회담이 있었다며 그와 함께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되면서 남북경협 움직임이 급물살을 탔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북한의 비핵화 움직임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반 전 총장은 “북핵 폐기와 관련해서는 북한의 실효성 있는 비핵화 조치가 먼저냐 미국의 제재 해제가 먼저냐를 둘러싸고 북미 사이에 실랑이만 벌어지고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고 평가했다.     

반 전 총장은 하노이에서 열렸던 2차 북미회담을 회상하며 “나조차도 이렇게 완전 결렬이라는 결과를 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3가지 잘못(mis)이 있었다고 진단했다. 

반 전 총장이 지적한 세 가지 잘못은 첫째,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의지와 전략적 시각에 대해 치명적인 오판(misjudgement)을 했던 점. 둘째, 미국이 북한의 오래된 기존 입장을 번복시킬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오산(miscalcul-ation). 셋째, 한국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북한과 미국의 입장에 대해 희망적 사고에 빠진 오역(misinterpretation)을 했던 점이다.

2차 북미회담과 관련 반 전 총장은 처음부터 비관적 전망을 하고 있었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의외의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강이 들었다고 말했다.

 

미북회담 결렬

“핵보유국 지위 인정보다 낫다”

 

강연에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트럼프 행정부에 대해 “국가안보전략(NSS), 국방전략(NDS), 핵태세검토보고서(NPR)와 같은 중요한 국가전략 문서에서 현재의 세계를 ‘경쟁적 세계’라 부르면서, 중국을 러시아와 더불어 ‘수정주의 강국들’이라 칭하며, 세계안보적 차원에서의 ‘경쟁자’(rival)로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북한이나 이란 같은 핵보유 후보 국가들을 ‘깡패’국가로 규정하고 ‘최대한의 압박과 관여’ 원칙에 따라 이 국가들의 핵보유 열망을 꺾으려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중국을 사실상 주적으로 삼고 있으며, 중국에 대한 현재의 경제적 군사적 압박은 이러한 미국의 세계전략 차원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미국 국가전략문서의 논리에 따르자면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동맹국가인 북한의 핵 보유를 반드시 저지해야 하며, 북한과의 핵 협상에서도 치밀하고 공격적인 입장을 내보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반 전 총장은 북미회담 결렬에 대한 소회도 밝혔다. 반 전 총장은 “협상의 완전 결렬은 실망스러운 결과임에 틀림없지만, 정상회담이 외화내빈의 외교적 쇼로 전락하고, 일부 핵시설의 폐쇄와 제재 완화가 맞교환되면서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가 사실상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사태가 오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결과다”라고 말했다.

또 “북한 비핵화를 둘러싼 김정은 위원장의 이해와 의도가 공식적으로 분명해진 것도 성과라면 성과”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도 확고해졌다는 점도 성과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 동안 북핵문제와 관련한 한미 양국의 외교안보전략은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지만,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살라미 전술이나 할리우드 액션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이는 향후의 남북, 북미정상회담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는 데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김창준정경아카데미 원우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과 김창준정경아카데미 원우들

굿이너프딜·톱다운방식

“미국에 먹힐 수 없는 것”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11일 있었던 한미정상회담에 대한 얘기도 했다. 

반 전 총장은 “우리 정부는 비핵화의 목표만 확인되면 단계적으로 비핵화 조치와 제재 완화를 이행한다는 이른바 ‘굿 이너프 딜’ 방안과 정상 간 ‘톱다운 방식’의 미북 대화 재개 방안을 마련했다”며 “이는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에 나서면 제재 완화를 하겠다는 미국의 ‘포괄적 합의’ 방안과 상당히 다르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우리 정부의 이러한 방안은 미국의 빅딜 방안과 북한의 살라미 전략 사이에서 어떻게든 미북 대화의 동력을 유지하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려는 정부의 고심이 담겨 있지만, 애초에 미국에 먹힐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향후 우리나라의 대응방안에 대해 “이제 북핵문제와 관련해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볼 때”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비핵화라는 기계는 남북, 한미, 북미의 세 가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톱니바퀴들 중 어느 것 하나 단단하지 못했고, 제대로 맞물려 돌아가지도 못했다”고 평가했다.

마지막으로 “삼자 모두 그렇지 않은 척했지만, 한 가지 핵심적인 문제 앞에서 이 톱니바퀴들의 취약함이 결정적으로 드러났다”고 전했다.

반 전 총장이 말한 ‘핵심적인 문제’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원칙’이다. 반 전 총장은 “2차 북미정상회담의 결렬과 그 이후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발언을 고려할 때 우리 정부의 선택지는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가치중립적 입장에서 선의의 브로커 역할을 하거나 북한의 편을 들거나 미국의 편을 드는 것인데, ‘선의의 브로커 역할론’은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고 김정은의 시정연설로 최종적 파산선고를 받았다”고 분석하며 “우리의 선택은 너무나 분명하다”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먼저 세 개의 톱니바퀴 중 ‘한미’라는 톱니바퀴만큼은 양국 정부가 의지만 있으면 단단히 조여지는 것이므로, 흠집이 나 있는 한미동맹을 수선하고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외교안보전략의 중심축은 한미동맹이며, 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면 안 된다. 한미동맹이 흔들리면 우리 외교안보정책 전반도 흔들리고, 다른 나라들과의 기존의 외교적 균형도 흔들린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한미동맹을 희생하면서까지 주변 강국과 관계를 강화하려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의 외교안보에 해로운 결과를 낳게 된다. 한미관계는 죽고 사는 관계이지만, 한중관계는 먹고사는 관계라는 세간의 말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반 전 총장은 “북한의 살라미 전술을 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북한의 가장 약한 고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며, 이는 경제 제재일 수밖에 없다”며 “제재가 북한의 핵 포기를 당장 가져오지는 않는다 해도, 북한 정권을 핵 포기 압력을 만드는 가장 좋은 압박 수단”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반 전 총장은 “문재인 정부는 그 동안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중개자를 자처하면서 핵 문제는 미국과 북한에 맡겨 놓고 남북 협력과 교류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정부가 계속해서 남북 협력과 교류에만 골몰한다면 한반도 안보 경기장에서 마이너 리그로 밀려날 수밖에 없고, 우리 자신의 운명을 타국의 손에 맡기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김정은조차 우리에게 태도를 확실히 정하라고 압박하는 마당에, 정부는 어떤 전략이 궁극적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가져오고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지 냉정한 현실주의적 평가를 한 후, 전략을 재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 전 총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선의의 브로커 역할을 자처하기보다, 차라리 김정은에게 2012년 이래 북한 헌법 전문에 포함된 핵보유국 지위 삭제와 노동당 규약 수정 및 자위적 핵보유국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는 법률부터 폐기해 북미관계의 전기를 마련해보라고 권유하는 것이 건설적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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