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이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 하던가?”
“갑자기 신열이 나서 거동하지 못한다 하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5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결발동문이 아니던가. 이제현은 예의 직감이 발동했다.
“치암이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가는구나. 가정, 함께 함양부원군 댁으로 가세.”
“예, 스승님.”
이제현과 이곡을 태운 자비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박충좌의 집으로 곧장 향했다. 이제현은 평소 정승으로 있어도 거처와 의복이 검소질박하고 강직했던 박충좌의 성품을 존경하여 그를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데는 검소와 절약을 숭상하고 
학문을 하는 데는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존중하누나.
천고에 제잠(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 우에
풍도와 명성은 게으른 사람을 격동시키도다.

십자가 서쪽 앵계리에 위치한 함양부원군의 집은 그의 성품만큼이나 정갈하고 고즈넉했다. 

“부원군 대감 계시느냐?”
“대감마님 오셨사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옵소서.”
노복이 나와서 이제현과 이곡을 반갑게 사랑채로 안내했다. 이제현은 박충좌를 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박충좌는 이제현과 이곡이 방문을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도 기진맥진하여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만큼 중환이었다.
“어찌된 게야, 이 사람아…….”
“어-서-오-게-나…….”

이제현은 파리하게 야윈 박충좌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치미는 울음을 애써 감추었다. 박충좌의 야윈 볼에도 두 줄기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얼마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이제현은 다시 말문을 열었다.
“치암, 우리는 권부, 백이정 선생의 문하에서 정주학을 동문수학했던 죽마고우 아닌가. 내가 왔으니 자네가 기운을 차려야 하지 않는가.”
박충좌는 입 속으로만 겨우 말문을 열었다.
“익재, 나는 평생 열심히 노력하는 뜻이 맑은 꿈과 임금 모시는 일이었네. 그러나 종사를 위해 이뤄놓은 일이 없이 먼저 가게 되어서 미안하네. 선왕(충목왕)과 금상(충정왕)이 모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덕녕공주와 희비 윤씨가 모친의 지위를 가지고 세도를 부리고 있네. 장차 금상에게 무슨 환란을 끼치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이네.”
“이 사람 치암, 어서 쾌차해야지 병석에서 무슨 나라 일을 걱정하는가.”
“익재, 생자필멸(生者必滅)인 것을. 나는 아무 여한도 미련도 없다네…….”
“치암, 최해와 안축이 가고 자네와 나 둘만 남았는데, 자네마저 나를 두고 훌쩍 떠나려고 하는가. 고약한 사람 같으니라고.”
“…….” 

두 사람은 말없이 눈빛만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시선을 나누었다. 무더운 한 여름 날씨만큼이나 답답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병색이 완연한 결발동문의 모습을 뒤로하고 이제현은 이곡과 함께 박충좌의 집을 나섰다. 
이제현에게 박충좌를 잃는다는 것은 피붙이를 잃는 일보다 더 가슴 아픈 일이었다. 최해, 안축이 가고 마지막 하나 남은 친구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관포지교로 맺어진 사이였다. 그래서 남들도 두 사람의 우정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런 박충좌가 세상을 하직하려 하고 있다. 이제현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스승의 회한을 옆에서 지켜보던 이곡이 이제현을 위로하는 말을 했다.
“스승님, 며칠을 넘길 수 있을까요. 고려의 큰 별이 하나 지고 있사옵니다.”
“치암은 대신이 되어서도 집과 옷이 예전과 다르지 않았네. 평생을 검소하게 산 것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강조했던 그의 명성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어.”
“함양부원군 대감의 지행합일은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사옵니다.”
이제현은 제자 이곡에게 박충좌와 함께 한 옛 추억을 소상하게 들려줬다. 
치암과 동문수학하고 스승 백이정의 유배지에도 같이 가서 모신 추억담, 관직생활을 하면서 상소도 같이 올리며 뜻을 같이 한 일화, 어린 시절 박연폭포에 함께 가서 도원결의를 한 일화 등을.
7월 정축일. 판삼사사 박충좌가 63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이제현은 형언할 수 없는 허무감에 가슴이 미어졌다. 이제현은 한쪽 날개가 떨어져 나간 아픔을 달래며 만시(輓詩)를 썼다. 그는 자신과 박충좌의 관계를 문경지교(刎頸之交)의 주인공인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명신 인상여(藺相如)와 명장 염파(廉頗)에 비유했다. 

눈이 어두워도 오직 복희서(주역)를 읽었고 
몸이 귀해져도 제갈량의 초려에 거처하도다.
아! 상군지(桑君池)의 가득 차는 물을
한 잔도 인상여(藺相如)에게 구걸하지 않았노라.
함께 고문(顧問)의 명을 받아 경연에 모시어  
만고풍상 겪어가며 백발토록 지냈네.
선생을 만나 배움이 참으로 큰 행복이었는데  
그대를 보내고 어찌 나 홀로 남았는가. 

《고려사》 <열전> 박충좌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박충좌의 자(字)는 자화(子華)이니 함양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좋아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하였다. 박충좌는 성질이 온후하고 검약을 숭상하였다. 주역 읽기를 좋아하여 늙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는 예안의 역동서원(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다시 정계 은퇴, 여인천하의 세력다툼

박충좌의 장례가 끝난 며칠 후. 제자 이곡이 인사차 이제현을 찾아와 문안인사를 했다.
“스승님께 하직인사를 드리러 왔사옵니다.”
“하직인사라니, 그 무슨 말인가.”
“관동지방 여행을 하면서 성리학 공부를 더 해볼까 해서요.”
“나는 자네의 원행(遠行)을 말리고 싶네. 집을 떠나 오래 있으면 몸이 상하게 되는 법인데 건강한 체질이 아닌 자네가 감당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걱정일세.”
“스승님, 염려 마시옵소서. 건강에 유의하고 잘 다녀오겠사옵니다.”
이곡은 스승 이제현의 뜻을 받들어 왕기(나중의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한 인물이다. 그러나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낀 나머지 관동지방을 주유(周遊)하겠다고 한 것이다. 친구 박충좌가 죽자마자 믿고 의지하던 제자가 불현듯 찾아와서 작별을 고하니 난감한 일이었다. 이제현은 이곡의 수(壽)가 얼마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괴로웠다.
1349년(충정왕1) 7월 병진일. 
원나라 순제는 한림학사 쌍가(雙哥)를 시켜 왕저(王)를 호송하였다. 쌍가가 왕저에게 국인(國印)을 전달하였다. 왕저의 몽골 이름은 미사감타아지(迷思甘朶阿只),  충혜왕의 서자로 희비(禧妃)윤씨의 아들이다. 왕저는 원나라로부터 귀환한 날 강안전(康安殿)에서 등극했으니 그가 고려 제30대 충정왕(忠定王)이다. 이 때 왕의 나이 12세였다. 
8세의 충목왕에 이어 12세의 충정왕이 연달아 들어서니 어머니 희비윤씨가 섭정을 했다. 왕이 바뀌면서 다시 정치보복의 계절이 돌아왔다. 왕기를 추대하는 글을 원나라 중서성에 올린 밀직사사(密直司事, 왕명의 출납을 맡은 밀직사의 종2품) 이승로(李承老)와 우대언(右代言, 밀직사의 정3품) 윤택(尹澤)은 시련의 세월을 겪게 된다. 두 사람은 충정왕의 미움을 받아 충정왕이 즉위하기도 전에 각각 선주구당과 광양현 감무로 좌천되었다.
좌천된 윤택과 이승로는 이제현의 문생들이었다. 두 사람은 임지로 부임하기 전에 인사차 스승 이제현의 집을 찾았다. 이제현은 두 제자의 정치적인 시련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이제현은 좌천된 두 제자를 따뜻한 말로 위로했다.
“작고한 박충좌가 ‘여덟 살밖에 안된 충목왕을 덕녕공주가 섭정하는 것은 마치 덕녕공주에게 나이 어린 임금을 빌려준 꼴’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세.”
이승로가 의문을 제기했다.
“스승님, 그래도 충정왕은 충목왕보다 연치가 네 살 위 아니옵니까?”
이에 윤택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승로, 충정왕이 연치가 높다하나 모후가 둘씩이나 정사에 관여하게 되면 종사가 과연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겠는가?”
이제현은 윤택의 의견에 동의했다.
“율정(栗亭, 윤택의 호), 잘 보았네. 앞으로 노책, 최유의 덕녕공주파와 윤시우의 희비윤씨파가 건곤일척의 패권경쟁을 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네. 자네들이 소인배들에 의해 억울하게 정치적 풍상을 겪게 되었지만, 두 세력의 틈새를 잘 이용하면 다시 조정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그러니 그때까지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예, 잘 알겠사옵니다. 스승님.”

윤택과 이승로는 스승의 예측이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좌천된 몸들이었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어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은 이제현의 집을 나서며 향후 스승의 거취에 대해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지내실 계획이옵니까?”
이제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충정왕의 재위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 역시 표(表)를 올려 왕기 대군을 세우기를 내심 청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는 업(業)이라는 것이 있네. 충정왕 재위 시에는 더 이상 관직에 참여할 생각이 없다네. 다만 충목왕 때에 지펴진 개혁의 불씨가 영영 사라져버릴까 그것이 걱정이네.”

결국 이제현은 다시 정계에서 한발 물러났다. 이때부터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그는 3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이제현이 내다보고 있는 정국에 대한 예측은 예리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이 있듯이, 필연적으로 충정왕의 새로운 측근들이 활개를 치는 조정이 열릴 것이다. 당연히 개혁세력들이 경륜을 펼 수 있는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충정왕의 즉위식 며칠 후인 1349년 7월 말일. 마침내 논공행상이 벌어졌다. 왕저를 옹립했던 세력들이 조정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노책은 첨의정승에, 손수경(孫守卿)은 판삼사사에, 이군해는 도첨의찬성사에, 최유(崔濡)는 기성군에, 희비윤씨의 외사촌인 윤시우(尹時遇)는 초천(超遷, 등급을 뛰어 넘어 승진)되어 정방제조에 각각 제수되었다.
충정왕의 즉위는 여인천하를 잉태했다. 희비윤씨는 고려인이었고 덕녕공주는 원나라인이었다. 이제현의 예측대로 희비윤씨(충정왕의 모후)와 덕녕공주는 치열한 세력다툼을 전개하며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모후가 수렴청정하는 조정은 권력싸움에 영일이 없었다. 벼슬을 구하는 자들은 희비윤씨와 덕녕공주의 두 대리인인 윤시우와 배전에게 청탁을 해야만 하였다. 두 사람은 시중(수상)보다도 큰 권한을 갖고 국정을 농단했다. 
나이 어린 충정왕은 두 여인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그로 인하여 충목왕 때 잠시 안정되어 가던 정국은 또다시 혼탁해져 갔다. 이렇게 권신들이 정치를 멋대로 처리하자 부원군(府院君) 한종유(韓宗愈)는 향리에 물러앉아 개경에 나타나지 않다가 공민왕이 등극하자 다시 조정에 출사하여 서연(書筵)에 들어가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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