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4월 총선을 겨냥한 한 차례의 전투가 끝났다. 예상대로라면 지리멸렬한 탐색전이었어야 했는데, 선혈이 낭자한 대규모 고지전이 되어 버렸다. 이로써 내년 총선은 일단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여야4당이 자유한국당을 포위하는 구도로 짜이고 있다. 연동형비례대표제 선거제도가 여야4당을 엮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전투에서 이긴 여당은 승리감에 취할 새도 없이 숨을 고르고 있고, 보수야당은 낭패한 심정을 감추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머잖아 전투에서 흘린 땀이 식고, 벌떡거리던 심장이 가라앉을 즈음이면 다들 냉엄한 현실 앞에 서게 될 것이다. 패스트 트랙 전투는 시작에 불과했다. 길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선거제도 공성전이 정치권을 덮칠 것이다.

선거법, 공수처법, 수사권 조정법을 패스트트랙에 올렸다는 것은 처리기한과 잠정 결론을 정해놓고 입법논의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길면 330일, 짧으면 180일이 지나면 여당은 패스트트랙에 올린 법안을 본회의 처리를 시도할 수 있다. 이제 자유한국당은 협상이 엎어지면 패스트트랙에 오른 법안이 처리될 수 있다는 부담을 안고 협상장에 들어서야 한다.

패스트트랙 정국에서 가장 승자는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라고 할 수 있다. 노동운동가 출신의 홍 원내대표의 임기 1년은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정권을 강탈당했다 여기는 자유한국당, 호시탐탐 보수본색을 드러내는 바른미래당, 심복지환이라 할 수 있는 민주평화당, 뱉기도 삼키기도 애매한 정의당 틈에서 임기 마지막에 대어를 건져 올렸다.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도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다. 나 원내대표는 ‘나다르크’라는 별명을 들고 대권가도까지 내달릴 것처럼 기세를 올리고 있다. 황교안 대표 외에 차기 주자가 보이지 않던 자유한국당에서 확실한 차기주자로 부상했다. 다만, 나 원내대표가 ‘나다르크’가 되기 위해 제물 삼은 ‘희생양’이 당의 미래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다.

한국정치는 승자와 패자가 확연하게 갈린 패스트 트랙 전투에서 보이지 않지만 가장 큰 패자가 되었다.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조정하고 봉합해야 할 정치가 본연의 역할과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버렸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국회가 항상 국민이 신뢰하는 기관 조사에서 꼴찌를 도맡아 왔던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치혐오는 항상 존재해 왔지만, 지양해야 할 과잉감정이거나 무지의 산물 정도로 취급받아 왔다. 안철수가 정치혐오를 자양분 삼아 국회의석수를 줄이자는 정치혁신안을 내놨을 때, “정치혐오를 즐기다 혐오의 당사자 된다”라며 십자포화를 맞는 것은 당연한 상식처럼 통했다. 정작 국민들이 갖는 혐오의 감정에 천착하고 해법을 찾는 고민은 적었다.

패스트트랙 이후에는 정치에 대한 혐오와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감이 뒤섞여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서 분출되고 있다. 5월 3일 현재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은 170만, 더불어민주당 해산 청원은 29만을 넘었다. 이런 국민청원에 대해 정치권은 또 각자의 계산에 따라 과잉해석하거나 별것 아니라고 무시하는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17년, 에마누엘 마크롱은 겨우 39세에 프랑스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마크롱의 정당 앙마르슈는 사회당과 공화당을 밀어내고 압도적인 과반의석을 차지해버렸다. 기성정치의 무능과 무기력에 지친 프랑스 국민들의 정치혐오는 프랑스 정치판 자체를 갈아 엎어버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젊은 마크롱을 대통령 권좌에 밀어올린 것은 결국 기성 정치권이었다. 우리나라의 정치혐오도 위험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국민들의 분노는 오늘 이 시간에도 올라가는 정당 해산 청원 참여자 수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문제는 이런 혐오, 국민의 분노가  새로운 인물, 정당을 탄생시킬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 역설적으로 해법은 극한 대결 속에 겨우 패스트트랙에 오른 연동형비례대표제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무진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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