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선진화법 도입 후 의안 발의 수 증가, 통과는 급감 식물국회 넘어 무생물 국회 보여주나

[일요서울 | 이도영 기자] 여야의 지난 패스트트랙 지정 대치 국면에서 오랜만에 ‘동물국회’ 모습이 연출됐다. 지난 2012년 국회 선진화법 도입 이후 7년 만이다. 국회는 패스트트랙 대치 이전부터 민생법안 처리가 시급함에도 식물국회로 불릴 정도로 법안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 왔다. 패스트트랙이 통과된 이후에도 자유한국당이 장외투쟁을 선포하며 국회 마비가 지속될 전망이다. 법안 강제통과를 막으려 동물국회를 금지했더니 아예 법안 논의조차 하지 않는 식물국회가 됐다.

20대 국회(좌) 18대 국회(우) [뉴시스]
20대 국회(좌) 18대 국회(우) [뉴시스]

-‘일하는 국회법’ 논의 테이블 만들어도 조용한 국회... 밥그릇 싸움에는 으르렁

지난달 25일과 26일 여야가 선거제 개혁안,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등의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 지정을 놓고 몸싸움과 고성이 오가는 ‘동물국회’를 재현했다.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여야 4당은 당초 패스트트랙 지정 합의안을 지난달 25일까지 처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26일 오전까지 한국당이 법안 통과를 온몸으로 막아서면서 약속한 날짜에 처리하지 못했다.

한국당은 의원들뿐 아니라 당직자 및 보좌진까지 동원해 대치 국면을 이어갔다. 한국당은 여야 4당 의원들의 법안제출과 회의장 진입을 저지했으나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여야 4당도 물러서지 않으며 물리적인 충돌을 빚었다.

법안 심의권을 물리력으로 막는 것은 국회 선진화법으로 금지돼 있다. 국회 선진화법은 국회의장 직권 상정과 다수당의 날치기를 통한 법안 처리를 금지하도록 한 법안이다. 다수당의 일방적인 국회 운영과 국회 내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지난 2012년 18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여야 합의로 통과됐다.

이전에는 국회의장의 직권 상정도 자주 있었다. 직권상정은 법안이 심의기간 내에 처리되지 못한 경우 국회의장이 자신의 직권으로 곧바로 본회의에 법안을 올려 표결에 부치도록 하는 것이다. 법안이 바로 본회의로 가는 만큼 거대·다수 여당의 밀어붙이기식 법안 처리를 뒷받침해왔다. 17대와 18대 국회에서는 각각 29차례, 97차례 직권상정이 있었다.

발의만 하고 의결 안 되는 의안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3일 오전 10시 기준 의안종류 전체 발의 개수는 2만 327개다. 이미 19대 국회(2012-2016)의 의안 전체 발의 개수 1만 8926개를 훌쩍 넘어섰다. 국회 선진화법 도입 이전 18대(2008-2012)와 17대(2004-2008) 때는 각각 1만 4947개와 8592개를 기록했다. 단순히 의안 발의 개수만 본다면 20대 국회는 그 어느 국회보다 열심히 일하고 활발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회의 의안 가결 개수를 보면 20대 국회가 얼마나 잠잠한지 알 수 있다.

20대 국회의 본회의 의안 본회의 가결 수는 2597건이다. 19대는 3417건이고 18대와 17대는 각각 2934건과 2549건이다. 19대 국회와는 1000건 가까이 차이 나고 동물국회 시절과도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아직 20대 국회 임기가 1년 가까이 남았다고 하지만 총선 국면에 접어들면 법안 처리는 자연스레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국회 임기가 끝나면 그동안 처리되지 않았던 법안들은 ‘임기만료’로 폐기처리된다.

의안 가결률은 20대(12.7%)·19대(18%)·18대(19.6%)·17대(29.6%)로 오히려 떨어져 처리는 하지 않은 채 단순히 법안만 많이 내는 게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법안 중에는 단순 자구 수정 수준에 그친 법안도 많았다. 오죽하면 지난해 12월 20일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회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다. 이 법은 ‘실적용 입법 방지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금 의원은 법안 제안 이유에서 “법률안 발의의 양적인 증가 이면에는 법률명 변경에 따른 인용법률명을 수정하거나 일본식 한자어를 한글로 순화하는 등의 단순자구수정 법률안을 발의하는 경우가 빈번한 것으로 나타나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며 “이에 인용 법률명의 변경, 단순 자구의 변경 등에 관한 사항이 있을 경우에는 법제사법위원회가 관련 법률안을 일괄하여 개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의원입법의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 법안 역시 본회의에 올라가지도 못한 채 소관 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여야가 외면한 대표적인 법안으로는 탄력근로제 단위 기간을 확대하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과 최저임금 결정체계를 이원화하는 내용의 최저임금법 개정안이다. 이 법안들은 소관 상임위원회의 소위원회에 가로막혀 있다. 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개정안 등 유치원의 공공성과 투명성 강화를 위한 이른바 ‘유치원 3법’은 역시 지난해 10월 23일 자로 의안을 제안했으나 아직까지 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국회가 침묵하자 문희상 국회의장이 발 벗고 나섰다. 문 의장은 상임위의 법안심사를 정례화 시켜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의장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국회법 개정안을 지난해 8월 운영위원회에 제안했고 지난달 5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일하는 국회법’으로 불린 개정안은 국회 내 상임위에서 담당하는 법률안 심사를 분담하는 2개 이상의 소위원회를 두고 소위는 매월 2회 이상 위원회를 열도록 정례화 했다. 하지만 패스트트랙이 모든 정치 이슈와 일정을 흡수했고 이후 여야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게 되며 이 법안도 현재는 무용지물이다.

여야 강성 발언 속 협치 희망은?

여야 지도부들이 서로를 향해 강성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29일 의원총회에서 패스트트랙 지정을 막고 있는 한국당을 겨냥해 “도둑놈들한테 이 국회를 맡길 수가 있겠느냐”며 “이런 자들한테 이 나라의 국회를, 장래를 맡길 수 없다”고 말했다.

한국당은 문재인 대통령을 저격했다. 황교안 대표는 지난 2일 서울역 광장에서 열린 ‘문재인 STOP! 서울시민이 심판합니다!’에서 “온 국민이 힘들어 하고 있는데 이 정권은 국민의 삶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며 “정작 패스트트랙을 태워야 할 법안은 민생법안들이다. 민생법안들은 다 제쳐놓고 독재정권 연장하는 악법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황 대표는 이날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권역별 순회투쟁을 진행했다. “패스트트랙은 의회 민주주의 폭거”라며 김태흠 의원을 포함해 성일종·윤영석·이장우 의원, 이창수 충남도당 위원장이 이날 오전 국회 본관 앞에서 삭발식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극한의 여야 대치 속 밀려 있는 민생법안을 처리하고 국회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문 의장이 한 번 더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문 의장은 지난달 24일 사보임 문제와 관련한 한국당의 의장실 항의방문에 쇼크 증세로 여의도성모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서울대 병원으로 긴급 이송된 문 의장은 30일 지병이던 심혈관계 긴급 시술을 받고 회복했고 지난 2일 퇴원했다.

문 의장은 이날 병문안을 온 한국당을 제외한 여야4당 원내대표에게 국회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전했고 본인도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6일부터 4박 5일간 중국 공식방문이 예정돼 있는 문 의장이 국회로 돌아오게 되면 여야 원내대표들과 회동을 갖고 식물국회를 넘어 무생물국회가 되지 않도록 국회 정상화를 위한 논의를 진행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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