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뉴시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뉴시스]

 

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통일은 현상을 타파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과정”
“우리 외교, 사안에 따라 협력·대립 달리하는 사고 가져야”


- 한국과 소련이 지난 1990년 9월 30일에 수교를 했고, 2017년 수교 27주년을 맞았다. 한·러 수교 27년의 경과를 냉철히 결산해 볼 때 양국 관계가 큰 발전을 이룩해온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 학계 일각에서는 한·러 양국이 지닌 잠재력과 협력의 당위성에 비해 양국관계의 양적·질적 수준이 기대한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도 일부 있다. 한·러 관계의 순조로운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또 이런 저해요인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방안은?

▲ 러일전쟁 이후에 국교가 단절됐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시작된 동서 냉전시대의 악영향으로 한국에서는 러시아를 대체로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았다.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연방이 탄생됐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러 인식은 아직 크게 변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자본주의국가로 바뀌었다. 자본주의의 역사가 일천하기 때문에 러시아 내에는 공산주의 소련 시절의 잔재가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변화한 러시아를 제대로 보기보다는 과거의 시각으로 러시아를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객관적인 시각으로 러시아를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북핵 문제에 관해서도 러시아의 입장이 반핵이나, 해법이 유연하고 포괄적이라는 점을 잘 파악해야 한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미국과 굳건한 동맹관계를 유지하면서 주변국가와 협력적 관계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통일은 현상을 타파해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과정이므로 질서를 탈각하는 생각을 해야만 성취되는 일이다.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의 다자질서를 창출해 기존의 양자질서와 조화롭게 융합해 나갈 수 있는 2차 방정식을 푸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동북아시아 질서가 평화질서가 되기 위해서는 양자보다는 다자적 질서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러시아가 한반도 통일의 새 시대를 여는 관건적 국가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또 자원이 많은 러시아는 협력 잠재력이 큰 나라인데, 잠재력을 현재화하는 협력관계로 전환시켜 나가야 한다. 한·러 무역규모가 현재 250억 달러 정도다. 이는 잠재력에 비해서 기대 이하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주변 국가와 비교해서 상호 전문가가 부족하므로 러시아에 대한 연구도 강화하고, 한·러 양국관계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냉전적인 시각도 하루속히 해소시켜야 한다.

- 러시아는 한반도를 에워싸고 있는 주변 4강 중 하나다. 한국의 국가적인 번영이나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또 통일 문제 등 여러 측면에서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대사가 판단하기에 역사적·지정학적·현실 국익적 관점에서 봤을 때 과연 러시아는 우리 한국에게 어떤 존재인가?

▲ 한반도는 지정학·지경학적 특성으로 인해 해양적인 시각과 대륙적인 시각이 혼재하는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해양국가적인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 이에 따른 정책을 추구해 왔다. 나는 주러대사로 근무하면서 세계를 보는 객관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점을 실감하고 한국의 진로를 생각할 때 북방적인 시각과 해양적인 시각을 균형 있게 조화시켜 나가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박사의 ‘거대한 체스판’이라는 책에서 보면, 유라시아대륙을 좌지우지하는 지도력을 행사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세계관이 나오는데, 주목할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외교가 해양과 대륙을 균형 있게 보지 못하는 대북정책을 추진하고 있어 대북정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대륙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북한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인위적 섬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 국가가 온전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상황을 탈피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남북이 소통할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통 인프라 구축이 신뢰 형성의 지름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대륙과 철도를 연결, 남·북·러 가스관 연결, 나진·하산 개발 등 러시아와 협력해야 할 부분이 많은데, 한·러 간 전략적 협력이 부재해 우리의 섬 탈출이 아직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 및 러시아와 수교하는 북방외교가 성공하고 소련이 해체되는 등 우리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 절호의 기회를 우리 외교가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점을 반성해야 한다. 

대북정책의 실패는 우리의 전략적인 사고와 행동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러시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공고히 해가는 사고로 새 판을 짜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독일의 경우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불행한 앙금이 많았으나 러시아에 접근해 서로의 이익에 부합하는 협력관계를 맺어 독일 통일을 달성했다. 독일과 러시아는 냉전 기간에도 상호 이익에 부합하는 에너지 협력을 지속해 신뢰관계를 구축했다. 상호 신뢰가 결정적 순간에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 일종의 에너지동맹이었다.

▲ 그렇다. 에너지동맹은 과거의 역사적인 앙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지되어 지금도 상호 안전과 번영을 도모하고 있다. 러·독 에너지동맹 때문에 2003년 미국이 수행한 2차 걸프전에 독일은 참전하지 않았다. 

독일의 영향력이 지대한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침공한 사태에 대해서는 러시아와 독일이 갈등하고 있다. 우리 외교도 사안에 따라 협력과 대립을 달리하는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북한의 핵 도발 때문에 나진·하산 개발을 위한 남·북·러 협력 사업이 무산됐다. 러시아와 전략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구체적으로 추진되는 사업은 미·러 관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추진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생존과 번영과 직결된 대러 사업은 과감하게 추진하는 전략적 용감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북극항로 개척 문제와 참차카·연해주 등 극동 개발 문제 등 블라디보스토크 동방포럼에서 논의된 한·러 협력 사업은 조속한 결실이 요망된다.

- 대사가 생각하기에 러시아는 한반도 통일의 방해 세력인가? 아니면 협력 세력인가?

▲ 내가 보기엔 통일에 관한 한 확실한 협력 세력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을 위해 우리는 대륙 세력과 협력해 나가야 되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현재 남방 루트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에너지 상황에서는, 러시아와 협력해 중동에서 에너지를 수입할 때 부당하게 부담하고 있는 아시안 프리미엄 문제를 해소해야 한다. 에너지 확보는 한반도 통일을 위한 역량 제고의 긴요한 과제다. 독일처럼 우리가 러시아와 에너지 동맹을 맺으면 통일을 우리가 주도할 수 있다.

러시아가 통일의 우호 세력이라는 논거는 전통적으로 태평양 진출을 목적으로 한국과의 협력관계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게 한국은 남태평양 진출의 관문이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그리고 한국과 우호적인 에너지 협력 및 한반도 통일을 위해 러시아의 협력이 필요하다. 양국의 전략적 이해가 합치되기 때문에 러시아가 우리 한반도 통일의 우호 세력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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