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해가 바뀐 1350년(충정왕2) 8월. 
130여 척의 왜구가 자연도(紫燕島, 인천)와 남양 등지를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남해안은 왜구와의 전쟁터로 돌변했다. 1345년 남해안을 처음으로 침략한 왜구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고려를 침입하여 노략질과 방화를 일삼았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의 백성들이 왜구들에 의해 유린당해도 고려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관리들은 출전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왜구를 피해 피난을 떠나는 실정이었다. 
이런 누란(累卵)의 와중에도 덕녕공주는 정동행성을 기반으로, 희비 윤씨는 왕과 외척들을 중심으로 패권경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이러한 외우내환(外憂內患)의 혼란은 마치 충혜왕대를 재현하고도 남았다. 그 결과 민심은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
이제현이 벼슬에서 물러난 지도 벌써 일 년이 지났다. 늘 가까이서 말동무가 되어 줬던 윤택, 이승로, 이곡이 없는 개경은 쓸쓸했다. 제자들의 빈자리를 이제현의 손자들과 동복(童僕, 사내아이 종)들이 채워줬다. 
여기는 이제현의 사랑방. 정당문학 이공수(李公遂)가 정계에서 물러나 있는 스승을 위로차 방문해 있었다. 이제현이 내방한 제자에게 선물로 줄 족자에 붓글씨를 쓰고 있는데, 아이들 중 한 놈은 이제현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다른 한 놈은 이제현의 등에 올라타도 이제현의 안색은 자약(自若, 침착)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문이 열리더니 아이들 몇 놈이 거침없이 뛰어 들어와 이제현의 무릎에 올라앉아 주안상에 있는 음식을 손가락으로 마구 집어먹었다. 그들은 종의 자식이었다. 
이공수가 놀라 입을 딱 벌리며 아이들을 나무라려고 하자 이제현은 손사래를 치며 껄껄 웃으며 말했다. 

“노비도 역시 하늘이 내린 백성이네. 종의 아이들은 사람이 아닌가?”
“…….”

아끼던 제자 이곡의 타계

해가 바뀐 1351년(충정왕3) 정월. 
이곡이 관동을 주유하던 중에 병을 얻어 타계했다. 향년 54세였다. 제자의 죽음은 이제현의 가슴을 천 갈래 만 갈래 찢어놓았다. 2년 전 아끼던 처남 왕후가 54세의 아까운 나이에 원나라에서 귀국 도중 병사한 아픔을 겪었던 이제현이기에 슬픔은 더 컸다. 문상을 간 이제현의 통곡과 오열은 가없었다.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내가 끝까지 원행(遠行)을 만류했다면 가정(稼亭)이 죽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아까운 사람을 죽였어…….’ 
이때, 이곡의 아들이자 이제현의 문생이기도 한 24세의 이색(李穡)은 1341년(충혜왕 복위2)에 진사가 된 후, 1348년(충목왕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아버지 이곡이 병을 얻자 귀국해 있었다.
이색이 원나라 유학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아버지 이곡이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학문을 권하는 시’ 때문이었다.

사내로 태어난 보람은 제왕이 있는 서울에서 벼슬하는 것이지만
나라에 몸 바침은 고생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를 작다 했으니
큰 곳과 높은 곳에 몸을 두었으면 좋겠다.

이색은 식음을 전폐하고 실신할 정도로 오열하는 스승 이제현의 모습에서 제자 안회(顔回)의 문상을 가서 탄식한 공자의 모습을 봤다. 
이색은 스승 이제현에게 간곡히 말했다.
“스승님, 스승님께서 아버님의 원행(遠行)을 그토록 만류하셨는데 아버님이 그만…….”
이색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이제현은 낮지만 천근의 무게가 실린 목소리로 제자를 위로했다. 
“근래에 재상들이 많이 죽었지만 우리 백성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본 적이 있었던가. 인명은 재천이라 하지 않던가. 가정(稼亭)은 비록 수는 다하지 못했지만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친 고려의 대문호가 아닌가. 목은(牧隱) 자네가 아버지의 유업을 잘 계승해야지…….” 

이곡은 1317년(충숙왕4) 거자과(擧子科)에 합격,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5년 뒤 원나라에서 정동성(征東省) 향시(鄕試)에 수석,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했고, 한림국사원검열관이 되어 원나라 문사들과 사귀었다.  
일찍이 이제현은 이곡이 원의 향시에 수석합격하자 시를 지어 축하했다.

내 일찍이 그대의 모골이 다른 사람과 다름을 알았노라.
눈 비비며 청운의 뜻 이루기를 바랐도다.
삼장의 풍뢰(과거합격)가 한미한 집에서 일어나니
황제의 은혜가 온 세상을 적시는구나.
압록강의 무성한 버드나무는 떠나는 마음을 사로잡았지
오금(한림원)에 꽃이 피니 마음껏 즐기구려.
술독을 풀어 회포를 논함이 어느 날에 있을까
백두의 몸 푸는 물가에 서노매라.

이곡은 스승인 이제현 등과 함께 민지가 편찬한 《편년강목》을 증수했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했다. 문장이 뛰어나 원나라에서도 존경받았다. 가전체 작품 《죽부인전》과 100여 편의 시가 《동문선》에 전하며 저서로 《가정집》이 전한다. 경상도 영해의 단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민족의 명절 한가위가 다가왔다. 
해질 무렵 타는 듯한 붉은 노을을 뒤로 하고 이제현은 가솔(家率)들과 함께 우봉현(牛峯縣) 도리촌(桃李村)의 선영을 참배하고 벌초를 끝낸 후 수철동 집으로 돌아왔다. 셋째 부인 서씨가 “명덕태후 홍씨(뒤의 공민왕의 어머니)께서 추석 선물로 곶감과 참기름, 쌀머루주를 보내주셨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제현은 환로에서 물러나 있는 자신에게 늘 마음을 써주는 명덕태후 홍씨가 고맙기 그지없었다. 때마침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이 산 너머 어둠을 박차고 얼굴을 내밀었다. 집 지키는 삽살개가 둥근달을 보고 속절없이 짖어대자 서걱대는 억새 소리에 울어대던 풀벌레도 울음을 멈추었다. 서쪽으로 뚫린 봉창으로 달빛이 교교하게 스며 들어 왔다. 
한가위를 하루 앞두고 있었기에 추석 차례상 준비를 위해 부녀자들은 번다하게 움직였고 음식 냄새가 바람을 타고 집안을 진동했다. 그러나 이제현은 사방이 적막함을 느꼈다. 가족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손자, 손녀들이 재롱을 떨 때까지는 몰랐는데, 막상 혼자 있게 되니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이제현을 외롭게 했다. 
이제현은 햅쌀로 빚은 송편과 애호박전, 녹두전을 안주로 하여 홀로 술잔을 비웠다. 박충좌, 왕후, 이곡 등의 얼굴이 주마등 같이 눈앞을 지나갔다. 특히 믿을 만한 후진을 양성해 두었다고 자부해 온 자신에게 이곡의 타계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이제현은 육십 중반을 넘은 자신의 평생을 생각해봤다. 
영욕의 세월이라 할 수밖에……. 간신과 외척이 세도를 부리는 조정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나 명리(名利)를 멀리하고 조정을 등지고 살 수 있을 것인가……. 권력 주변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법. 예측하지 못한 시공(時空)에서 나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이 파도처럼 밀려올 수 있는 것을 어찌 모르는가…….  

고려왕을 갈아달라는 편지를 쓰다

추석 차례를 지내면서 이제현의 뇌리에는 권문세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는 조정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재산과 권세가 정의로, 관직과 학문이 광대놀음으로 인식되며, 곧은 말과 바른 논의가 미친 소리로 취급당하는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권문세족의 횡포를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학문적 교양과 정치적 실무 능력을 갖춘 신진 사대부들이 유학의 이념으로 현실 문제를 개혁하는 시대적 소임을 다해야 한다. 

추석날 저녁. 이제현은 연경의 만권당 시절부터 친분을 쌓고 있었던 원나라 정승 완안아해(完顔阿海)에게 고려왕을 갈아달라는 편지를 써서 윤택 편에 연경으로 보냈다.

완안아해 족하께.

저는 누대의 임금을 모시면서 나라를 위해 지금까지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고려조정이 밑동부터 썩어가고 있고 사직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족하께 붓을 들었습니다. 충목, 충정 두 어린 왕을 섭정한 모후들의 횡포와 당여(黨與)들의 부패상이 악취를 진동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를 방치하면 고려는 물론 상국인 원나라에도 결코 이롭지 못합니다. 그러니 족하께서 황제 폐하께 고려의 실상을 제대로 알려 고려의 주상을 갈아야 한다고 상주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고려의 백성들과 신료들은 모두 연경에 볼모로 있는  강릉대군 왕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이 늙은 목숨을 바쳐 나라의 중흥에 초석이 될 수 있다면 내일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경인년 8월 15일. 익재 이제현 씀 

9월 그믐날. 
고려의 남쪽 지방은 온통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들의 천지가 되어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에 고려 조정은 2년 전 왕기를 추대하는 글을 원나라 중서성에 올렸다가 좌천된 선주구당 이승로와 광양현 감무 윤택을 주문사로 선발했다.
두 사람은 연경으로 가서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왕의 교체를 청원하는 진정표(陳情表)를 올렸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