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正論), 직필(直筆)의 전통을 자랑하는 일요서울이 창간 25주년을 맞이했다. 1994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우리나라의 새로운 언론문화 창달의 기치를 내걸고 출범한 지 사반세기. 일요서울은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국민의 알권리를 향상시키는데 그 어느 언론사보다 크고 막중한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할만하다.

돌이켜보면 일요서울의 지난 사반세기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언론환경 속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일간신문과 TV뉴스는 주간지가 경쟁하기에는 벅찬 상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요서울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여론을 주도했다. 한동안은 무가지와 경쟁해야 했고, 지금은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종이 신문 그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며 지난 사반세기 일요서울은 대한민국 유수의 언론사로 우뚝 서며 창간 25주년을 기념하게 된 것이다. 일요서울은 그 자체만으로도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자화자찬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 지난 사반세기의 성장을 바탕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성숙한 언론을 지향해야 할 때다.

일요서울이 한창 성장하던 시기 교육부장관을 역임했던 어떤 지성인은 현재의 우리나라 언론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질타했다. “형식적 민주화가 진척되고, 각종 뉴미디어가 판치는 오늘, 언론은 진영논리에 따른 저급한 이념공방과 정권의 눈치 보기에 바쁘고, 내용조차 ‘클리셰(Cliche)’로 일관한다. 감정을 자극하는 언론은 있으나, ‘생각하게 만드는’ 언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듯 이들은 우리사회의 ‘비(非)이성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유로운 비판정신과 공의(公義)를 추구하는 치열함이 없다. 이처럼 국민이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언론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서글픈 일이다.”

이러한 언론에 대한 질타에 대해 일요서울은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창간 25주년을 맞이한 일요서울이 풀어야 할 문제이다.

그렇다. 정치판의 진영논리가 우리사회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의와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보편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상대를 이해하거나 상대를 설득하려 하지 않고, 상대에 대한 적대감만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 언론이다.

그렇다면 일요서울이 추구해야 할 참 언론의 길은 무엇일까?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다. 국민의 신뢰는 어떻게 얻는가? 정직(正直)해야 한다. 정직한 사람이 신뢰를 얻듯 정론, 직필의 언론만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정론과 직필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유혹을 넘어서야 한다. 우선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영논리에 빠져들면 기준점이 움직이게 된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무뎌지기도 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조차 바뀌어 버린다. 기회주의적이고 시대 영합적인 TV 뉴스가 설 곳이 없어진 이유는 이미 시청자들의 그들의 교활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언론 본연의 기능인 비판정신을 추구해야 한다. 단순한 전달자 역할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사회를 정의와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보편적 기준에 입각하여 현상을 바라보고 분석해야 한다. 이는 언론의 숙명이다. 이를 망각하면 죽은 언론이다.

마지막으로 자정기능을 강화해야 한다. 정치권의 곁불을 쬐려 해서도 안 될 것이고, 광고주의 헛기침에 부화뇌동(附和雷同) 해서도 안 된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정론직필의 사풍을 제대로 전수해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얻은 일요서울의 새로운 사반세기, 설렘으로 맞이하고 싶다. <이경립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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