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부터 2000년까지…누가 ‘뜨거웠나’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주간 일요서울이 올해로 창간 25주년을 맞았다. 늘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과 접촉하며 독자들의 정보와 흥미를 이끌었던 일요서울. 25주년을 맞아 그 가운데서도 창간해인 1994년부터 2000년까지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인물들을 추려봤다. 

왼쪽부터 최은희, 김정은 전 국방위원장, 신상옥. [뉴시스]
왼쪽부터 최은희, 김정은 전 국방위원장, 신상옥. [뉴시스]


1. 신상옥·최은희, ‘납북 vs 자진 월북’ 논란부터 ‘北 탈출’까지


첫 번째로 선정된 인물은 ‘북한 납치설’에 연루됐던 신상옥(본명 신태서)과 최은희(본명 최경순)다. 일요서울은 1994년 6월 5일 제4호에서 ‘[비화추적] 북한탈출 최은희·신상옥…“미CIA의 성공한 공작”’이라는 기사로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실었다.

일요서울은 취재 배경에 관해 신상옥 감독이 발표한 영화 ‘증발’의 내용 삭제 여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며,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의 북행(北行) 미스터리를 추적해 본다고 밝혔다.

이 기사는 ▲납치였나, 자진입북이었나 ▲북한탈출과 미CIA의 역할 ▲최은희 증언 “북의 납치행각” ▲탈출자금 230만 달러의 정체라는 골자로 구성, 해당 사건을 소상히 다뤘다. 

신상옥과 최은희는 각각 영화감독과 배우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1953년 신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다큐멘터리 영화 ‘코리아’라는 영화에서 만나 이듬해인 1954년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최은희와 신상옥은 각각 1978년 1월과 7월 납북됐다. 당시 이 사건을 두고 납북인지, 자진 월북인지에 대해 여러 말이 오갔으나 1984년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북한에 의한 강제 납북’으로 공식화했다.

이들은 납북 이후 북한에서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설립하고 영화를 제작하는 등 예술 활동을 지속해 왔다. 1986년 3월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한 이들은 그곳에서 북한의 감시를 피해 미국 대사관에 은신을 요청해 북한을 탈출했다.

이에 관해 일요서울은 “‘거대한 감옥’으로 표현돼 온 북한에서 신·최 씨는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을까. 미CIA의 끈질긴 공작이 두 사람의 탈출을 성공시켰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신상옥 씨가 미 CIA와 연락을 취했던 것은 탈출하기 2년 전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는 신 씨의 친구인 故김인환 박사의 식구들을 통해 탈출 의사를 미 CIA에 전하도록 했다”면서 “신 씨는 이때 탈출을 위한 암호를 몇 가지 정해서 보냈다”며  탈출 과정에 관해 상세히 설명했다.

 

마광수 전 연세대학교 교수 [뉴시스]
마광수 전 연세대학교 교수 [뉴시스]


2. 문학계 이단아, 마광수


두 번째 인물은 소설 ‘즐거운 사라’로 법정에 선 마광수 연세대학교 전 교수다. 일요서울은 1994년 7월 10일 제9호에서 마 전 교수와 단독 인터뷰를 진행했다. 마 전 교수는 그해 6월 29일 ‘사라’ 사건의 항소심 결심공판을, 인터뷰와 같은 달 13일 2심 선고공판을 치렀다.

마 전 교수는 1992년 ‘음란문서 유포’ 혐의로 강의 도중 검찰에 연행, 구속됐다. 여기서 음란문서란 같은 해 개정판으로 발간된 그의 소설 ‘즐거운 사라’를 가리킨다. 이 소설은 문화부에 의해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  

일요서울은 1심이 마 전 교수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을 언급하면서 “이 재판은 출판물의 음란성 여부 판결이 주 내용이지만, 문화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한 교수에 대한 판결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재판이 아닌 정치적 재판으로 비화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후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마 전 교수는 생면부지였던 이태동·안경환 교수가 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피고를 정식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충격을 받았다며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그토록 감정적이고 주관·객관을 혼동하고 있는지 몰랐다”고 서술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라’ 문제가 도덕성 상실과 음란물의 문제로 인식된 것에 대해 “표현의 자유 문제와 인권 문제, 그리고 교권 및 수업권의 문제와 문학과 성의 관련성에 대한 문제, 즉 문화의 민주화에 대한 문제라고 본다”고 피력했다.

일요서울은 마 전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마 전 교수가 구속 수사당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와, 안 교수가 감정서에서 언급한 ‘문화의 하수도’ 논쟁, ‘즐거운 사라’의 8만부 인세 미지급 등을 주요 주제로 다뤘다.

마 전 교수는 1992년 1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은 뒤 상고를 제기했지만, 1995년 법원으로부터 징역 8개월과 집행유예 2년이라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 때 사면 복권됐다. 다만 ‘즐거운 사라’는 아직까지도 출판 금지 상태다.

마 전 교수는 지난 2017년 9월 5일 자택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당시 언론은 정황에 비춰봤을 때 그가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보도했다. 그는 이 사건 이후 평소 우울증을 겪어온 것으로 전해졌다.

 

주병진 [뉴시스]
주병진 [뉴시스]


3. 주병진vs재미교포 유 씨 고소戰


일요서울은 1998년 3월 22일 제202호에서 당시 뜨거웠던 주병진과 재미교포 유재필 사이 고소 분쟁을 다뤘다.

두 사람의 다툼은 같은 달 5일 유 씨가 PC통신에 ‘내가 주병진을 제소한 이유’라는 글을 게시하면서 다시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당시 희극인으로 활동하던 주병진은 1990년 ‘좋은사람들’이라는 속옷 브랜드를 론칭, 이 회사의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었다.

일요서울 보도에 따르면 유 씨는 ‘좋은사람들’과의 미주지역 총판 계약협상이 불발되자 90만 달러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주병진은 “법적인 하자가 전혀 없다”며 “이미지 실추, 명예훼손 등 피해는 우리가 더 당했는데 도의적 책임 운운은 가당치 않다”며 맞섰다.

두 사람은 미국에서의 총판계약을 위해 공동작업을 펼쳐 왔다. 하지만 상품명 ‘제임스딘’과 ‘보디가드’가 미국 내 상품등록이 되지 않아 정식 계약을 미뤄 오다가, 유 씨가 현지 신문에 대리점 모집 광고를 올리자 ‘좋은사람들’이 “본사와 협의 없이 ‘보디가드 아메리카 미주본사’라는 허위의 이름으로 대리점 광고를 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계약을 해지했다.

이에 유 씨는 “회사 측이 이유로 내세우는 대리점 광고는 총판계약에 다 포함돼 있는데, 굳이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은 계약 파기를 위한 트집 잡기에 불과하다”며 이들을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한 것이다.

좋은사람들은 “(유 씨가) ‘보디가드 아메리카 미주본사’라는 얼토당토않은 명칭까지 임의로 (광고에) 게재했다. 그리고 대리점 신청자들에게 보증금조로 10만 달러를 요구하기도 했다”며 “우리 회사나 사장에게 심각한 명예훼손을 입히고 있는 만큼 그에 대한 법적 대응을 현재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이후 주병진은 여러 구설에 휩싸여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난 3월 ‘좋은사람들’은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병진의 사외이사 선임 안건을 상정해 회사 복귀 논의가 피어올랐으나, 이를 철회하면서 무산됐다.

 

 

검거 당시 조세형의 모습 [뉴시스]
검거 당시 조세형의 모습 [뉴시스]

 

4. 大盜에서 잡범으로…조세형

 

1980년대 ‘드라이버’ 하나로 유력 인사들의 집을 턴 대도 조세형을 일요서울이 만났다. 일요서울은 1999년 5월 2일 제260호에서 ‘盜風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주제로 조세형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조세형은 1984년 범행 당시 부총리와 재벌회장 등 소위 고위 부유층을 상대로 그 같은 일을 벌여 ‘대도’라는 별칭을 얻은 인물이다. 그는 일요서울과의 인터뷰가 진행될 때에는 한 선교회의 교정특수선교 담당 강사직을 맡고 있었다. 이후 1999년 조세형은 한 경비업체의 고문직을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일요서울이 조세형과의 인터뷰를 기획한 이유는 고위층의 주택을 전문으로 터는 ‘김강용’이라는 사람이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김강용은 범행 대상 등이 조세형과 유사해 ‘현대판 대도’라 불렸고, 이후 피해자 리스트를 폭로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상습 절도로 검거된 조세형은 무기징역을 구형받고 재판을 받던 중 1983년 4월 14일 서울 형사법원 구치감에서 도주했고, 5일이 지난 19일 다시 체포됐다. 이후 같은 해 11월 26일 석방돼 15년 8개월 동안의 수감 생활을 했다.

조 씨는 일요서울이 ‘김강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자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 사람은 결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부도덕한 범죄자”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범행한 고위 부유층의 특성 등을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조세형은 2001년 선교를 목적으로 방문한 일본의 고급 주택에서 도둑질을 하다 체포됐다. 또 이후 2005년, 2010년, 2013년 빈집털이와 장물 거래 등의 범죄를 자행해 붙잡혔다. 

잇따른 범행으로 교도소를 오가던 조세형은 77세가 되던 2015년, 석방 5개월 만에 장물 거래를 하다 경찰에 검거됐고 그 이듬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슈퍼옥수수'로 유명한 김순권 박사 [뉴시스]
'슈퍼옥수수'로 유명한 김순권 박사 [뉴시스]

 

5. ‘옥수수박사’ 김순권, “정치적 이용 말라” 토로한 까닭
 

일요서울은 1999년 12월 19일 제293호에서 ‘슈퍼옥수수’로 유명한 김순권 박사와 인터뷰를 했다. 김 박사는 1992년 이래 매해 노벨상후보로 거론될 만큼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국제열대농업연구소의 초청으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17년간 연구하며 기생잡초에 강한 옥수수와 수확량이 많고 질이 좋은 옥수수를 개발했다. 
김 박사가 오랜 아프리카 생활을 거쳐 한국에 귀국한 이유는 ‘북한’ 때문이었다. 그는 북한 주민들의 극심한 식량난 소식을 전해 듣고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북한에 옥수수 심기운동’ 등을 시행하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방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주진우 한나라당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슈퍼옥수수 종자 대북지원사업’은 현정부와 김 박사가 빚은 일종의 사기극”이라며 맹공격을 퍼부었다. 또 야권에서는 김 박사의 잦은 방북을 두고 ‘대북밀사가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김 박사가 “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인터뷰에서 김 박사는 “나를 학자로 봐야지, 정치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했다. 

이와 더불어 ‘이 같은 선행이 노벨상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일요서울의 질문에 그는 “노벨상이 그렇게 쉽게 탈 수 있는 것인가. 같은 동포가 굶어죽고 있는데 내가 가진 ‘옥수수 기술’을 그들에게 나눠주는 것 일 뿐”이라며 “내 자신을 위하거나 노벨상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리는 북한동포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김 박사는 경북대학교 농학과 교수, 동 대학교 국제농업연구소 소장 등을 거쳐 1998년 국제옥수수재단의 이사장이 됐다.

이 밖에도 그는 국제농업연구대상(벨기에 국왕상), 국제기술개발상(이탈리아), 대통령 해외봉사상, 아프리카 국가연합 농업연구상, 국가과학기술연구회 과학기술인상 등을 받으며 해외에서도 높은 성과를 일궜다. 또 국제작물분야 봉사상, 국제디자인프로세스과학회 학술공헌상 등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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