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54]
삼 불 망(三不忘) - [54]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9-05-13 14:49
  • 승인 2019.05.13 14:54
  • 호수 1306
  • 56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황제 폐하께. 
충정왕이 나이가 어린 탓으로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 국정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희 동방의 소국은 지금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고려의 남쪽 해안 지방이 왜구들에게 유린당해도 조정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임금을 정해줘야 합니다. 번국(蕃國)이 성해야 상국(上國)이 흥한다 했습니다. 황은(皇恩)을 내려 주시옵소서.

원나라 조정은 어전회의를 열어 이들의 청원을 논의했다.
원나라 순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고려의 신하들이 자신들의 왕을 폐위시키려고 하는가?”
“왕이 어려서 덕녕공주와 희빈 윤씨가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사옵니다.”
“권력투쟁을 막을 무슨 방도가 있는가?” 
“여러 대신들이 나랏일을 돌보지 않고 붕당을 지어 탐욕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좀 더 유능한 왕자를 보위에 앉히는 게 좋겠사옵니다.”
“유능한 왕이 나와 고려가 강성해지면 안 되지 않는가?”
“고려 조정은 연소하고 암우(暗愚)한 어린 왕과 권력에 눈이 먼 섭정모후 때문에 원나라에 짐이 되고 있사옵니다. 고려가 강성해지면 안 되지만 아주 쇠약해져도 번국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이옵니다. 강성하면 원나라를 배신할 것이고, 쇠약해지면 원나라에 경제적인 짐이 될 것이옵니다.”
10월 초. 마침내 고려의 신왕을 결정하는 최종적인 원나라 어전회의가 열렸다. 원나라 조정은 고려의 정치적 난맥상과 왜구의 대규모 침략으로 인한 국방의 취약성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어린 충정왕을 정점으로 하는 기존의 고려 조정을 부정하고 충정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자는 것이 대세였다. 
그리하여 고려 내에서 신망이 높고, 왕위 계승에 유리한 조건을 많이 갖추고 있는 왕기가 고려 신왕 후보로 부각되었다. 이에 따라 원 황제의 의중도 강릉대군 왕기에게 옮겨졌다. 
마침내 조정의 공론을 수렴하여 정승 완안아해가 황제에게 상주했다.
“고려의 금왕(今王)은 연소하고 섭정 모후의 횡포와 당여(黨與)들의 부패가 심합니다. 삼촌인 강릉대군 왕기를 신왕으로 옹립하는 게 타당하다고 사료되옵니다.”
결국 원나라 순제는 조정의 중론을 따랐다.
“충정왕을 물러나게 하고 강릉대군 왕기를 왕으로 책봉하라.”

공민왕, 이제현의 시국방략을 따르다

고려 국왕의 단명은 원나라 황제들의 빈번한 교체와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원나라는 1294년 세조 쿠빌라이가 죽은 뒤부터는 황제위 쟁탈전과 권신들의 전횡이 심했다. 반세기 동안 황제가 11명이나 바뀌었다.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는 13세에 제위에 올랐으나, 국사(國事)보다는 티베트 불교(라마교)에 탐닉하고 후궁들에 묻혀 사는 등 나약한 지배자였다. 그의 치세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무기력과 쇠퇴로 점철되어 말기 증세를 보여 침체와 퇴영의 그림자가 끼기 시작했다. 고려 31대 공민왕은 이러한 원나라의 혼란의 시기에 고려 국왕에 즉위하게 된다.

신묘년(1351, 충정왕3) 10월 임오일. 
하늘엔 핏빛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만권당 정원의 수목과 조화를 이루며 장관을 연출하던 단풍이 차가운 바람에 한 잎 두 잎 떨어져 어은(만권당의 연못)위에 떠다니는 저물어 가는 늦가을 오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귀에 익은 말발굽 소리가 만권당 주변에 울려왔다. 세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관청들이 즐비한 대로를 돌아 한적한 만권당 대문 앞에 당도했다.
세 사내는 금빛과 붉은 색으로 어우러진 관복과 군복을 입고 있었다. 관복을 입은 자는 황명을 전달하는 중서성의 벼슬아치이고, 군복을 입은 두 사람은 그를 배행하는 호위병이었다. 군졸 하나가 앞으로 나서더니 문을 두드렸다.
“대군께서는 안에 계시느냐?”
“어디서 오셨는지요?”
“황제의 명을 받잡고 온 사자(使者)이다.”
“옛? 황제의 명이라고요! 어서 드십시오.”
만권당을 지키는 문지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 필의 군마는 대문을 성큼 들어서고 있었다. 
사자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고려의 강릉대군 왕기는 대원제국 황제의 명을 받으시오!”
잠시 후 시종 관원들의 안내를 받은 강릉대군 왕기는 집무실에서 나와 마당에 부복(俯伏)했다.
사자는 두루마기 축을 펼쳐들며 황제의 칙명(勅命)을 읽어 내려갔다. 
“왕기는 즉위 교서를 받기 위해 곧 입궐하라!” 
왕기는 곧바로 황궁으로 들어가 원나라 황제에게 복명했다. 황제는 왕기에게 그동안 볼모 생활에 대한 고생을 위로하고 마침내 교지(敎旨)를 내렸다.
“강릉대군 왕기를 고려왕으로 봉한다. 단사관(斷事官)이 돌아오는 대로 곧 귀국하여 고려의 신왕으로 즉위하라.” 
원 순제는 고려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충정왕을 폐하고 22세의 왕기를 고려 제 31대 왕에 봉했다. 왕기의 몽골 이름은 백안첩목아(伯顔帖木兒, 빠이앤티무르)로 그가 바로 공민왕이다. 공민왕은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충혜왕의 동복아우이다.
이때 공민왕은 헌헌장부로 부쩍 성장해 있었다. 15세, 20세에 조카인 충목왕, 충정왕에게 두 번씩이나 왕위 경쟁에서 쓰라린 패배를 겪어 본 터였기 때문이다. 
공민왕은 왕위에 대한 집념을 버린 것으로 가장하기 위해 학문을 닦으며 문학예술에만 심취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두고 주변 사람들은 ‘조부인 충선왕을 빼어 닮았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이튿날. 고려의 사신으로 온 윤택과 이승로는 황제가 임명한 단사관 완자불화(完者不花)와 함께 먼저 고려로 떠났다. 단사관이란 황제의 조서를 전하는 특명 사신이다. 전왕을 폐하고 신왕이 등극할 수 있도록 모든 절차를 밟고 옥새를 거두어 연경에 돌아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공민왕, 이제현을 섭정승 
권단정동성사로 임명하다

공민왕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두 가지 결단을 내렸다. 
하나는 미처 귀국하지 못한 상태에서 왕위 교체로 발생한 정치적 공백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신진 사대부의 우두머리 격인 이제현을 섭정승(攝政丞) 권단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임명한 것이다. 섭정승은 고려의 국무를 관장하였던 도첨의사사의 최고위직인 정승을 대리하는 직책이고, 권단정동성사는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던 정동행성의 업무를 임시로 총괄하는 직책이다. 
다음은 찬성사 조일신(趙日新)에게 비목(인사 발령에 관해 임금이 재가한 사목)을 주어 먼저 귀국시켰다. 
65세의 이제현은 조정 내외로부터 신망 받고 있는 원로 정치인이었다. 충정왕 즉위 후에 벼슬에서 물러난 후 실로 3년 만에 마지막 정치적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로써 이제현은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진기록을 세운다. 이제현은 당시 명목상 고려왕이 겸임하고 있는 정동행성의 최고위직인 승상에 임명되자, 깊은 상념에 잠겼다. 
태조 왕건이 피를 흘리며 다져온 왕업이 광종, 성종대의 왕권 안정을 통해 문종대에 꽃을 피웠지만, 무신정권시대와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자주국의 체모를 상실한 지 이미 백년 가까이 되었다. 어느 왕조이고 역사의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그동안 영걸이 나타나지 않아 왕권이 흔들렸지만, 다행히 원나라가 쇠퇴일로를 겪고 있고 공민왕은 성군의 자질을 타고 났으니 다시 고려를 재건할 수 있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생각을 끝낸 이제현은 공민왕에게 섭정승에 취임하는 겸양과 충절로 가득찬 글을 올렸다.
전하, 신은 재주가 없고 나이가 많아 만사가 남보다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정승 권단정동성사가 되었으니 그 막중한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앞으로 신은 조종(祖宗)의 전고(典故, 전례와 고사)에 따라 군국(軍國)의 모든 정무를 전하의 뜻에 따라 깊은 못가에 간 듯, 얇은 얼음을 밟는 듯 조심스럽게 처리하겠사옵니다. 바라옵건대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선발하여 백관에 대비하겠사오니 조속히 새 교지(敎旨)를 내려 주시옵소서.
집안은 온통 잔치 분위기였다. 명실공히 고려 말의 격동의 역사에 새 지평을 열어갈 명재상이 탄생한 것이다. 관료 중 최고의 관직인 도첨의정승이 된 것은 개인은 물론이거니와 가문의 영광이었다. 
이제현은 아내, 아들딸, 사위, 자손들에게서 하례(賀禮)를 받았고, 소식을 들은 친인척과 문생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정치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염량세태(炎凉世態)라 했던가. 썰렁하기만 했던 이제현의 사랑채는 또다시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