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56]
삼 불 망(三不忘) - [56]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9-05-27 15:16
  • 승인 2019.05.27 15:27
  • 호수 1308
  • 58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찬성사 조일신이 비목을 가지고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이제현은 머뭇거리거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하게 조정 인사를 단행했다. 
이몽가(李蒙歌)가 판삼사사에, 조익청(曹益淸)과 전윤장(全允臧)이 찬성사에, 조일신과 조유(趙瑜)가 참리에, 이공수(李公遂)가 정당문학에, 이연종(李衍宗)이 밀직사 겸 감찰대부에, 윤택(尹澤)이 밀직제학에, 이승로(李承老)가 지밀직사사에, 백문보(白文寶)가 전리판서에, 최영(崔瑩)이 도부장군에 제수되었다. 
이제현이 약관 35세의 최영을 수도 경비군의 책임자인 도부장군으로 발탁한 이유는 그가 어지러운 국내외 상황 속에서 고려를 지탱해 줄 동량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현은 전광석화처럼 인사를 단행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우유부단은 반드시 화를 초래한다’는 태공망(太公望)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 잘한 판단이라고 자위했다.
공민왕은 귀국하기 전에 자칫 나라가 혼란에 빠질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제현과 손을 맞잡고 인사를 단행했다. 이는 공민왕의 정치가 충목왕대 개혁의 연장이 될 것임을 예고한 신선한 조치였다. 이에 대한 장안의 화제도 만발했다.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면 돈과 여자 그리고 인사와 이권 청탁이 봇물을 이루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익재 시중의 집에는 그런 똥구더기들이 몰려들지 않고 있다네.” 
“그동안 붕당을 지어 고려의 국가 기강을 문란 시켰던 덕녕공주의 측근들과 충정왕의 외척 세력들을 일망타진했으니 속이 시원하네.” 
“간신배 다섯 놈이 어떤 짓을 했는지, 이 나라 금수강산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사람은 다 알 것인데, 익재 시중이 오적(五賊)을 응징했으니 통쾌하네.” 
하루하루 고된 삶에 쪼들리는 민초들은 이제현의 쾌도난마와 같은 인사정책에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덕녕공주의 측근들과 충정왕의 외척 세력들의 숙청이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위안이 되는 일이고도 남았다. 

일련의 개혁조치를 한 후 얼마 안 가 이제현은 조신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의 집무실에서는 매일같이 크고 작은 국사에 대한 진지한 토의가 이루어졌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개경 입성

그해(1351년) 섣달 경자일. 
연경을 떠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행차는 북풍한설(北風寒雪)을 뚫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 서경을 거쳐 개경을 향하고 있었다. 이때 원나라 조정의 한림학사였던 공자의 54세손 공소(孔紹, 노국공주의 스승)가 노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귀화, 평장사가 되었으며 한국 공씨의 시조가 된다.
고려 서북방면에서부터 백성들이 길가에 구름처럼 몰려 두 사람의 귀국행차를 축하했다. 공민왕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다시 10년 만에 조국 땅을 밟게 되었으니. 서경을 지나 개경이 가까워지자 공민왕은 감개가 무량한 듯 좌우 산천을 돌아보며 어가의 수레 위에 나란히 앉아 있는 노국공주에게 말했다.
“공주, 여기가 내가 태어난 고려의 개경 땅이오.”
“전하, 고려의 수도가 이렇게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아름다울 줄은 미처 몰랐사옵니다.”
“우리 태조 대왕께서 국호를 고려라 정한 것도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커다란 꿈 때문이었고, 평양을 서경이라 하고 실지 회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오. 허나 국력이 미약해서 백 년 전에 몽골(원나라)의 속방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오.”
“전하, 소첩의 조국 원나라가 원망스럽지요?”
“…… 우리 고려가 원나라의 속방으로 대칸을 모신 지 벌써 100년이 되었지만, 고구려, 발해 때는 요서, 요동 지방을 지배하던 동방의 주인으로 외부의 다스림을 받을 나라가 아니라오.”
“…… 아 - 예.”
노국공주의 마음은 편찮았다. 원의 공주로 태어나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고려 왕자와 정략결혼을 한터라 애틋한 애정을 가지고 혼사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지금 원 황실은 점차 기울어가고 있는 형국이어서 이제 고려로 시집온 이상 다시 원나라로 돌아 갈 수 있을지 기약 없는 길이었다. 하지만 노국공주는 영리한 여자였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특히 공민왕의 인품과 학덕을 연경에서 2년 동안 겪어왔기에 모든 것을 지아비에게 의지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행차는 나성인 선의문(宣義門)을 통해 본궐에 도착했다. 원나라 황제는 실독아(失禿兒) 태자와 직성사인 아홀(牙忽)을 보내 공민왕의 행차를 보호케 하였다. 새 임금을 맞이하는 조정은 한창 부산스러웠다. 
1351년 섣달 임인일. 
고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새로운 날이 밝았다. 원나라의 간섭과 수탈에 찌든 고려의 새로운 주군의 탄생을 축복하듯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우람한 아침 해가 온 누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공민왕은 조하(朝賀)시간에 맞추어 경령전(景靈殿)에 나아가 태조 왕건과 사조(四祖, 임금의 4대 선왕)에게 고유(告由, 종묘에 나라의 사유를 고하는 의식)하였다, 그리고 만조백관들이 궁문 서쪽에 늘어서서 왕을 맞이하였다. 
“만세, 만만세!”
강안전(康安殿) 뜰에 도열한 만조백관들은 목소리를 돋우며 상체를 굽혔다.
공민왕은 눈부신 아침 햇살을 온몸에 받으면서 강안전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면류관 앞뒤로 늘어뜨려진 구슬줄은 영롱한 오색 광채를 뿜어내며 흔들렸고, 붉은색 용포를 입은 공민왕의 모습은 궁녀들이 받쳐주는 일산(日傘) 속에서 엄숙하게 보였다. 
공민왕은 강안전에서 조하를 받고 즉위하였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강안전 뜰에 도열해 있는 만조백관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둥둥둥!
공민왕의 등극을 알리는 장엄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열한 만조백관들은 만세를 연호하면서 새로운 왕에게 국궁(鞠躬) 사배(四拜)를 올렸다. 전국의 명산대찰에서는 신왕 경축의 제를 올리고 만백성은 새 임금의 선정을 빌었다. 
즉위한 다음 날. 개경 거리와 궁궐에 소담스런 서설이 내렸다. 공민왕의 추종자들은 겨울 가뭄 끝에 하늘이 새 왕을 축복하여 내리는 눈이라고 떠들며 기뻐하였다. 
이윽고 공민왕은 인사를 단행했다. 이제현은 ‘대리’ 꼬리표를 떼고 도첨의정승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자리에 올랐다. 바야흐로 이제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날부터 이제현은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그는 온후하면서도 부드럽게 사람들을 대했으며 서열이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에게 정중했다. 이와 같은 ‘절제와 예’라는 덕목이 군주를 모시는 자의 품성이 되어야 함을 이제현은 몸소 실천했고, ‘부드러운 위엄’은 그를 보다 높고 고귀한 존재로 만들었다.  
공민왕의 등극으로 고려 조정은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정중동(靜中動), 물밑에선 치열한 암투가 전개되고 있었다. 덕녕공주의 총신들과 충정왕의 외척 측근들의 빈자리를 조일신과 기철의 두 세력들이 차지했던 것이다. 
고려 조정은 이때부터 기황후의 후광을 등에 업은 기철 일가의 세력과 이들을 견제하는 시종공신 조일신의 세력이 각축전을 벌이고, 도첨의정승으로 국정을 장악한 이제현의 세력 등이 이들 세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조정하는 형국이었다.
조일신(趙日新)의 도당들은 정천기, 최화상, 장승량, 고충절, 임몰륜, 안진, 이권, 나영걸, 정을보 등이었고, 기철(奇轍)의 도당은 기원, 기주, 기륜, 고용보, 권겸, 노책 등이었다. 이제현의 계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은 윤택, 이승로, 이공수, 백문보 등 촉망받는 성리학자들이 고작이었다.
조일신은 공민왕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서 숙위(宿衛)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그 공으로 참리(參里, 첨의부의 종2품 재상직)가 되고 1등 공신에 책봉된 후 곧 판삼사사로 승진했다. 그는 왕을 모시고 놀이를 구경할 때도 왕과 나란히 앉을 정도로 오만방자한 인물이었다. 
기철은 누이동생이 원나라 순제의 제2황후가 되어 태자 아이유시리다라를 낳고 원나라에서의 세력이 강대해지자, 이를 배경으로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그는 교만하고 포학해져 남의 토지를 빼앗는 등의 불법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이처럼 새 시대에 권력을 잡으려는 양대 군웅(群雄)들은 무력적 기반이 없는 성리학자 이제현을 시기 가득찬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들은 공민왕이 이제현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다. 따라서 양대 군웅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제현을 그냥 둘 수만은 없었다. 그들이 언제 어떤 형태로 이제현을 제거하기 위한 승부를 걸어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한 불안을 안은 채 새로운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공민왕은 이제현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젊어서부터 고려를 개혁하려 하였고, 학문이 고려에서 으뜸인 점을 높이 샀던 것이다. 이제현도 공민왕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펴 보려는 애국심에 불타 있었다. 그것은 고려 사회의 모순과 혼란을 극복하고 자주 독립의 반듯한 나라 건설을 목표로 해온 일관된 그의 꿈이었다.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