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남한산성’의 비극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병자호란 때 갇힌 성안의 무력한 임금 인조 앞에서 벌어진 김상헌으로 대표되는 주전(主戰) 척화파와 최명길로 대표되는 주화파(主和派)의 다툼은 조선 조정 파당싸움의 가장 치명적인 내부 분열 현상이었다.

소설 「남한산성」저자가 표현한 것처럼 척화파는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서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 항쟁을 고집했다. 반면 주화파는 비록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를 줄 것이라고 했다. 그 둘 사이에서 결단을 할 수 없었던 인조임금은 작가의 말대로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를 수없이 반문하며 번민해마지 않았을 것이다.

인조임금이 오랑캐 왕 앞에 꿇어 엎드려서 세 번 이마에 피가 나도록 땅을 찧으며 아홉 번 절하는 항복례의 치욕을 겪기까지 이 땅 민초들에게 가해진 수난과 다가 올 고초는 필설로 다 형언키 어려운 것들이었다. 애꿎게 오랑캐 땅에 노예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還鄕女)가 국가로부터의 보상과 동족의 위로를 받기는커녕 오히려 ‘화냥년’으로 불려 더욱 설움을 겪는 역사비극도 일어났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이런 남한산성의 비극이 까마득한 옛 얘기로만 들릴지 모르겠으나 작금의 이 나라 주변정세도 매우 중차대한 국면에 놓여있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특히 중국의 무섭도록 급속적인 경제 기술적 성장은 얼마 안가서 한국의 경제 항복을 이끌어 낼 것이란 관측마저 일으키는 마당이다. 이런 면에서 지금 대한민국을 책임지고 있는 집권세력은 어느 때보다 분명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겠다.

하루가 다른 주변국 정세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한민국 실태는 대통령선거 앞둔 이전투구식 논쟁만 가열되고 있다. 국민은 천근같은 가슴으로 그들 정치권의 대선 올인 양상을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다. 그들은 언제나 국민 이름을 팔지만 대권욕의 잿밥 밖으로 진정 조국의 나아 갈 길을 고민하고 있는지는 의심되는 바 크다.

국가경제에 총체적 도전을 받고 있는 한반도 주변정세를 놓고 신주전론(新主戰論)과 신주화론(新主和論)이 대립하는 국론 분열양상에 대해 그들 정치 세력은 한마디 말도 없다. 1627년 후금국(청나라)의 조선1차 침입(정묘호란)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지국의 맹약을 맺는 것으로 양국관계가 일단락됐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전역을 석권해 북경을 넘보게 되면서 우리에게 양국관계를 군주국과 신하국의 군신지국으로 고치고 황금 1만냥에 명나라를 쳐 없애기 위한 전투마 3천필, 정병 3만을 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인조임금은 8도에 선전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의 결전을 선포했다. 아무 준비 없는 조정에서 명나라 사대파 척화론의 승리였다. 병자년 남한산성의 비극은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힘없고 나약해지면 강자에 의해 계속 끌려 다니며 비굴해할 수밖에 없는 교훈을 인조 조정이라고 몰랐을 리 없다. 다만 당시 조정을 장악했던 척화파의 현실 왜곡이 주효했던 까닭일 것이다.

이래서 역사왜곡보다 현실왜곡이 더 무섭다는 것이다. 이 시대 한국정치를 쥐락펴락 좌지우지하는 세력들, 남한산성의 비극을 떠올려볼만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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