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관 오럴 히스토리] - 정태익 편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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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외교원 외교사연구센터에서 ‘외교’라는 렌즈를 통해 우리 현대사를 조명하기 위해 오럴히스토리사업 ‘한국 외교와 외교관’ 도서 출판을 진행해 왔다. 지금까지 총 16권의 책이 발간됐다. 일요서울은 그중 정태익 전 주러대사의 이야기가 담긴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지면으로 옮겼다.

 

“동북아시아 국가 간 협력질서 구축은 한반도 통일의 필수적 요소”

 

-대사께서는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현직 외교관보다 더 왕성한 사회 활동을 하고 있다. 정년 이후에 맡은 직책들 가운데 가장 애착이 가고 의미가 있는 직책은 무엇인가.

▲퇴임 후에도 외교 문제 관련 기관이나 부서에서 활동했다. 지난 2005년 말에 퇴임을 했는데, 2006년 초부터 경남대학교 초빙교수가 돼 외교안보 문제와 통일 문제에 관련한 활동을 계속해 왔다. 베링해협 평화포럼의 한국 측 대표로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는 한·일 해저터널포럼 활동하고도 연계돼 있는데, 우리가 한반도 평화, 나아가서 동북아시아 평화를 달성하는 주도국이 되기 위해서는 한반도 중심의 평화 인프라가 구축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활동을 했다.

서구에서도 영국과 유럽대륙 국가 간에 역사적인 갈등과 애증관계가 지속돼 왔기에 이를 해소하려고 우리와 똑같은 지정학·지경학적 고민을 해 왔을 것이다. 고민의 결과 해결책을 마련해 EU와 같은 통합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 최근 영국이 브렉시트로 EU 탈퇴를 선언했지만 동북아시아 지역에서도 당면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통합을 모색하기 위해 관계국의 협력이 필요한 한일터널, 베링터널, 북극항로 건설 등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나는 이러한 평화루트를 구축함으로써 동북아시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는 일에 종사해 왔다. 인류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사업이기 때문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동북아시아 국가 간의 협력질서 구축은 남북한관계 개선과 더불어 한반도 통일의 필수적 요소다.

또 단국대학교 우석한국영토연구소 소장직을 2년간 역임했다. 독도 문제는 단순히 영토를 지키는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독도 문제가 발생한 연원은 동북아시아 안보환경의 변화와도 관련이 깊다. 독도 문제는 동북아시아 안보 문제의 연장선에서 분쟁 이슈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고유의 영토를 수호하는 현안일 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우리가 주도해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명제를 갖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퇴임 후 제일 보람된 경력은 한국외교협회 회장직이다. 공공외교와 국익 수호 및 창달에 기여하는 직책이라고 생각한다. 퇴임 후에도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나아가서 통일의 길을 여는 데 작지만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보람을 느낀다.

-외교협회는 외교부 산하기관인가. 주로 어떤 역할을 하나.

▲외교협회는 외교부의 현역과 퇴임한 인사들의 복지와 공공외교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운영되는 조직이기 때문에 공익법인이다. 그래서 법인체로 독립돼 있지만 업무적으로 외교부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는 기관이다.

-대사께서는 베링해협 평화포럼 한국대표를 맡아서 활동 중인데 베링해협 평화포럼은 어떤 비전을 가지고 활동하는 단체인가.

▲우리나라가 통일되기 위해서는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주변 관계국의 협력을 확보해야 한다. 통일은 한반도의 새로운 질서 구축이 전제돼야 한다. 한반도 주변에는 강대국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강대국 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미국과 러시아는 동북아시아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전략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강대국이다. 두 강대국을 서로 협력하게 하려면 협력의 물리적 구조를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터널을 연결해서 왕래가 잦아지면 왕래에 따른 협력 질서가 자연스레 형성될 수 있다. 미국과 러시아가 협력하기 위한 인프라를 깔자는 것이다.

베링해협 터널이 건설되려면 선결 여건이 조성돼야 한다. 베링해협 주변은 앞으로 세계가 의존해야 할 자연의 보고 지역이다. 알래스카는 앞으로 미국을 지탱할 자원의 보고다. 캄차카 방면의 극동 지역은 러시아의 장래를 떠받칠 수 있는 지역이다. 양 지역은 한반도와도 연결돼 있어 우리가 앞으로 경제적으로 의존해야 할 지역이다. 한반도 통일의 필수 요건 가운데 하나가 지역협력체 형성이다. 외부적인 조건이 조성되지 않으면 통일이 쉽지 않다. 한반도 통일의 지정학적·지경학적 여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형 프로젝트를 구상해서 계속 논의하고 실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목표를 위해 벽돌 한 장씩 쌓아간다는 생각으로 베링해협 평화포럼 대표를 맡고 있고 먼 장래에 우리 국익에도 부합한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왜 미국의 국무장관을 역임했던 헨리 키신저나 즈비그뉴 브레진스크 같은 걸출한 외교 전략가가 배출되지 못하고 있는가. 대사께서는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알다시피 국제적 질서의 흐름에 대한 견해는 이상주의자적인 임마누엘 칸트와 같이 세계평화라는 명제를 내세워 규범적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현실적으로 국제질서를 보는 시각이 있다. 그래서 현실적인 국제정치의 대표적인 학자로 한스 모겐소가 있다.

또 최근에는 존 미어샤이머 교수가 현실적인 국제정치학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새로운 세력이 기존 세력을 타파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방법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왔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지금 동북아시아에서 중국이 경제적으로 부상하는데 반드시 군사적인 쪽으로도 힘을 확대하게 되므로 미·중 간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한국이 이러한 현상에 잘 대처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미·중 간의 경쟁관계에 대해서 살펴봐야 되고, 우리의 국력을 잘 분석해서 대처해야 한다. 국력이 강한 쪽과 협력관계를 강화해야 우리가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국제적 흐름에 대한 선택을 잘못해서 피해를 입은 사례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배다.

서양에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잘 보고, 잘 대처해 나가는 키신저나 브레진스키 같은 외교전략가가 있고, 이 밖에도 모겐소 같은 국제정치 대학자들이 나왔는데, 우리는 왜 그런 전략가가 존재하지 않느냐.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시야에서 정책을 펼쳐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학자를 배출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외교의 자율성이 강화돼 풀어야 할 외교적 과제가 많고 복잡해졌다. 남북관계도 그렇다. 남북관계가 국제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난국을 헤쳐 나갈 수 있는 큰 전략가, 위대한 지도자가 나와야 우리가 생존할 뿐만 아니라 남북통일이라는 국가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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