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공민왕에게 이제현은 왕도(王道)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었다. 공민왕은 이제현으로부터 시국방략에 관한 현하지변(懸河之辯)을 듣고 나니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히던 먹구름이 개이고 찬란하게 빛나는 파란 하늘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가슴이 후련해지는 상쾌감을 폐부 깊숙이 느끼며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
‘나는 먼저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산업을 장려하여 국력을 키워 백여 년간 지속된 원나라 식민지의 치욕을 씻을 것이다. 부국강병을 바탕으로 자주국의 독립성을 되찾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여 찬란한 영광을 재현할 것이다.’ 
공민왕과 이제현의 치국문답을 옆에서 묵묵히 듣고만 있던 노국공주는 이제현의 우국충절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왕후의 면전에서 배원정책과 원의 쇠망을 입에 담는 노 선비의 기개에 적이 놀라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제현의 치국방략에 매료된 노국공주는 불쑥 공민왕에게 그동안 심중에 담아두었던 말을 했다.
“전하, 섣달 경자일 도성에 입성하면서 전하께서는 소첩에게 ‘우리 고려가 원 제국의 속방으로 대칸을 모신 지 벌써 100년이 되었지만, 고구려, 발해 때는 요서, 요동 지방을 지배하던 동방의 주인으로 대칸의 다스림을 받을 나라가 아니라오’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소첩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사옵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답을 찾았습니다. 익재 시중께서 그 답을 소첩에게 일깨워 주었답니다.”
공민왕은 함박웃음을 띠며 반갑게 말했다.
“아, 그렇소이까?”
“전하, 소첩은 원나라 황족 출신이나 이제는 어엿한 고려왕의 아내이옵니다. 따라서 소첩은 원나라의 여자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고려의 여자로 죽을 것이옵니다. 소첩에 대해 너무 괘념치 마시고 전하의 뜻을 널리 펴소서.”  
“고맙소이다. 공주…….”
이제현은 공민왕으로부터 받아 마신 하사주 덕분에 화색이 도는 얼굴로 편전을 물러나왔다. 허리를 굽히는 상궁 내시들의 몸놀림에도 득의와 활력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이제현은 광화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환로(宦路)에 나섰던 지난 50년 가까운 세월의 풍상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현은 조금전 노국공주가 ‘소첩은 원나라 여자로 태어났지만, 죽을 때는 고려의 여자로 죽을 것이옵니다’라고 한 말이 마음에 걸려 잠시 상념에 잠겼다. 
‘노국공주는 참으로 명석하고 지혜로운 여자로서 자신의 조국 원나라를 잊고 금상을 잘 내조할 수 있겠구나. 그러나 정에 약한 금상이 너무 노국공주에 빠지게 된다면…….’ 
그러는 사이 이제현을 태운 자비는 황궁을 나와 선지교(후에 선죽교로 이름이 바뀜)를 지나 수철동 자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편, 수철동 이제현의 사랑방에는 감찰대부 이연종, 밀직제학 윤택, 정당문학 이공수, 도부장군 최영, 그리고 부친의 삼년상을 치르고 있는 이색이 미리 와서 이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야심한 밤에 모두 어인 일이신가?”
“금상께서 시중 어른을 찾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오게 되었사옵니다.”
“금상께서는 원나라 정세를 훤히 꿰뚫어 보고 계시며 조정의 개혁을 꿈꾸고 계시다네.” 
이제현은 이연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자신의 문생들인 이들에게 경계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권력은 너무 가까이 하면 화상을 입을 수 있고 또 너무 멀리하면 동상을 입게 될 수도 있네. 주어진 권력의 절반만 행사한다고 생각한다면 마음도 편하고 뒤탈도 없을 것이야. 이는 정치의 근본임을 명심해야 할 것일세.”
“…….”
“공자도 ‘못된 정치는 사나운 범보다 더 무서운 것(苛政猛於虎 가정맹어호)’이라 했네. 조정이 권력을 탐하는 정상배들의 놀이터가 되면 나라의 주인인 백성들이 고달퍼지네. 옳은 것은 한 사람만이 주장하여도 옳은 것이며 잘못된 것은 대다수가 지지하여도 잘못된 것이네. 또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적인 생각은 자신을 망치는 근원이니 모두들 자중자애하며 정사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게나.”
자리를 함께한 모두는 이제현의 가르침이 구구절절이 옳아서인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한 목소리로 답했다.
“시중 어른의 생각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금상과 시중어른의 바람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도록 정사에 임하겠사옵니다.”
“우리들 모두 금상을 잘 보필해서 조정을 반석위에 올려놓도록 하세.” 
고려를 개혁하고 조정을 일신하겠다는 일념에 불타는 선비들의 모임은 자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 밤이 깊어 모두들 자리를 마감하려고 일어났다. 
이때 말석에 있던 이색이 두툼한 서류뭉치 하나를 스승 이제현에게 건넸다. 이색은 3년 전 19세에 원나라 유학길을 떠났다가 아버지 이곡이 타계하자 귀국해서 3년상을 치르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가?”
“시중 어르신께서 국정을 개혁하시는 데 참고가 될 만한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왜구에 대한 대책), 교육의 진흥, 불교 폐단의 개혁 등 당면한 여러 정책에 관한 건의문이옵니다.”
“고맙네, 상중에 언제 이런 정책 건의문을 정리하였는가? 목은이 원나라에 가서 성리학을 공부한 솜씨를 내 한번 감상해보겠네.” 
“시중 어르신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렵사옵니다.”

공민왕의 개혁에 날개를 달아주다 

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말이다. 
임진년(1352, 공민왕1), 용이 여의주를 몰고 온다는 ‘용의 해’를 맞이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용은 마음대로 비를 오게 하거나 멈추게 할 수 있는(雲行雨施 운행우시) 조화능력을 지닌 수신(水神)으로서, 불교의 호교자로서, 그리고 왕권을 수호하고 국가를 지키는 호국용으로 받아들여졌다. 용이 갈구하는 최후의 목표와 희망은 구름을 박차고 승천하는 일이다. 승천하지 못하는 용은 한갓 웅덩이의 이무기로 머물 수밖에 없다. 공민왕과 이제현에게 새해는 하늘의 선행과 풍요를 빌고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듯 고려의 국운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성대해짐을 바라는 한해였다.  

1352년(공민왕1) 정월 초하루.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에 들러 하례인사를 올렸다. 실독아(失禿兒) 태자가 원 나라 황제를 대신하여 받는 신년하례였다. 공민왕 부부는 본궐로 돌아와서 어룡정(御龍井) 우물을 열고 고려 사직의 성공을 기원했다. 어룡정의 세수(歲水) 행사는 대소 신료들이 신년 초 샘물을 마시며 새해의 운수가 샘솟듯 솟구치길 기원하는 경건한 행사였다. 
2월 초하루. 
이제현은 자신이 설계한 개혁 프로그램을 공민왕에게 상주(上奏)하였다. 공민왕은 이제현이 마련한 일련의 개혁 작업의 구체적인 실행에 돌입했다. 열성조(列聖朝)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종묘(宗廟)에서 제사지낼 날은 3월 초하루로 결정되었다. 공민왕은 일주일 전부터 재계(齋戒)에 들어갔다. 3일 전부터 관련 부서들은 분주하게 제사지낼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제삿날이 다가왔다. 아직 동트기 전인 새벽녘, 의장대는 전정(殿庭, 대궐 뜰)에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형성했다. 높은 품관의 신하들과 종친들은 각각 전문(殿門) 밖에, 그 이하 관리들은 의봉문(儀鳳門) 밖에서 문관은 동쪽에, 무관은 서쪽에 서서 정열하였다. 그 엄숙한 분위기가 자못 대단했다. 
잠시 후 북소리와 함께 자황포를 갖춰 입은 공민왕이 전각에 나와 좌정하여 간단한 예를 행하고, 가마를 타고 종묘로 향했다. 종묘로 가는 왕의 행렬은 장엄하면서도 엄숙했다. 오직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잘그락잘그락 관리들의 패옥(佩玉) 부딪치는 소리와 또각또각 느릿한 말발굽 소리만이 고요한 적막을 깰 뿐이었다. 
마침내 공민왕은 본궐 동남쪽에 위치한 종묘에 도착했다. 공민왕은 재궁(齋宮)에 들어가 관리의 인도를 받아 면류관과 곤룡포로 갈아입었다. 
이윽고 제사를 주관하는 관리의 말이 떨어졌다.
“맡은 자들이 다 준비하였으니 행사를 진행하시길 바라옵니다.”
관리의 말이 떨어지자 공민왕은 손을 씻고 당에 올랐다. 제상에는 신실(神室)에서 옮겨온 신주(神主)를 필두로 여러 모양의 술잔마다 각기 다른 술이 담겨 있었고, 각양각색으로 생긴 제기에 나물·각종 곡식·국·고기·떡 등이 놓여 있어 강신(降神. 신이 내려오는 것)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공민왕은 정성을 다해 각 신위에 술을 올렸다. 뜰아래의 악공들은 느릿느릿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의 음악을 연주하고 무공들은 너울너울 춤을 췄다. 의례가 시작될 즈음은 새벽녘이었으나 각 신주마다 술과 음식을 올리고, 이것을 초헌관인 공민왕과 아헌관, 종헌관이 반복하다 보니 어느덧 반나절이 걸려 해가 중천에 떴다. 이후 음복을 하고 신을 돌려보내는 송신(送神)의 예를 행하며, 신주를 다시 모셔 들이고 제사 때 읽은 축문이 쓰인 축판(祝板)을 불살랐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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