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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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 여사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6·25전쟁 뒤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국내에서 여성운동가로서 여성인권운동을 이끌었다.

이 여사의 삶은 1962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이 여사는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인생 동반자이자 정치적 동반자로, 김 전 대통령과 함께 '행동하는 양심'으로 현대사의 거친 길을 걸어왔다.

'이희호가 없는 김대중을 생각할 수 없고, 김대중 없는 이희호를 생각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투쟁 일선에 나설 때 정신적 지주로서 그를 지지했다. 본인 역시 민주화 투쟁 동지로서 역할을 다했다. 

이들의 힘든 여정은 1971년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과 붙은 대선에서 46% 득표로 선전했지만 낙선하면서 시작됐다. 

1972년 유신 독재가 시작되고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라이벌'로 불렸던 김 전 대통령은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 여사는 당시 정보기관의 감시를 피해 김 전 대통령에게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며 그를 지지하기도 했다.

1973년에는 '김대중 도쿄납치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이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된 큰 시련이 왔지만, 이를 이겨내게 한 것도 역시 이 여사의 도움이었다. 그러나 이후 김 전 대통령이 정치 활동을 금지 당하고 가택연금, 옥고를 치르면서 이 여사도 함께 고난의 시간을 보내게 됐다. 

1979년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잠시 정치 활동이 재개됐지만,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김 전 대통령이 내란음모 사건으로 수감되고 사형을 선고받으면서 다시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이 여사는 이 고난의 기간 유신 독재와 신군부의 탄압에 맞서 싸웠으며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이 여사는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정권과 타협하지 말라며, 김 전 대통령이 신념을 지키도록 힘을 줬다. 

특히 김 전 대통령이 옥고를 치르고 죽음 앞에 설 때마다 전 세계 유력 인사들에게 호소력 짙은 편지를 보내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여사는 지난 2009년부터 김대중 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지내며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아 남북관계와 평화 증진, 빈곤 퇴치 등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이 여사는 지난 3월부터 병세가 악화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가족과 동교동계 등은 이 여사의 병세가 악화될 것을 염려해 지난 4월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의 별세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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