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옳은 민주주의는 다함께 잘 살자는 것이다.따라서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얼굴은 ‘젊은급진’도 아닐 것이고 ‘늙은보수’도 아닐 것이다. 표현하자면 ‘젊은보수’쯤이라고나 할까.과거 단절의 혁명적 이론은 자칫 전통문화의 가치를 짓밟을 위험이 있다. 우리 현대사는 혁명으로 이름 지은 추악한 폭력에 숨죽인 시대가 있었고 자유라는 이름으로 미쳐 날뛴 방종의 시기도 있었다. 왜 그랬는가. 그 답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오로지 격하고 급한데서 온 조바심이 만든 결과일 것이다.영국의회가 전제군주의 횡포에 저항해서 국왕의 권력을 제한토록 한 것이 1215년이다. 그리고 왕의 권력을 유명무실토록 한 명예혁명(1689년)에 이르기까지 5백년 가까이나 걸렸다. 그럼 그 후의 영국이 어떠한가. 권력을 떠난 빈껍데기 국왕, 즉 군림하면서도 통치하지 않는 국왕이 통치를 않음으로 해서 오히려 통치하게되는 변증법적인 의미를 낳고 있다. 이는 권력 아닌 새로운 수단의 국가지배를 말하는 것으로 권력은 때로 민중을 탄압하지만 권력 없는 국왕은 거꾸로 민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냈다. 이렇게 보면 정신적(仁)이고 도덕적(德)차원의 국가통치가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 아닐 것이다.공포정치를 정당화하는 근거
건국의 아버지로까지 불린 이승만 박사가 실패한 역사를 만든 이유가 뭔가.그가 전통적인 중앙집권적 전제주의 문화를 베이스로 깔고 ‘국민주권 원칙에 의해 대통령으로 뽑았으면 맡겨야 한다’는 독단적 생각을 갖지 않았다면 우리역사는 엄청 달라졌을 것이다. 국민주권주의가 이런 도그마(Dogma)에 빠지면서 공포정치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어 독재합리화의 늪을 만든 것이다. 우리민족은 오랜 세월을 허우적대다가 겨우 늪에서 빠져 나왔는가 했는데 다시 국민이 냉철하지를 못한 까닭에 언론의 캠페인과 이익집단의 논리에 수동적으로 끌려간 대가가 오늘의 갈등과 대립, 국론분열 양상일 것이다.국민이 스스로 판단하는 고유영역을 지켜내지 못하고 통치자의 판단과 해결에 맡기는 것은 피상적인 복종으로 독재를 요구하는 것이나 진배없는 이치다. 우리는 지금 사회제도를 바꾸고 버리면서, 또한 새로 만들면서 과거단절의 혁명적 이론보다 전통존중 정신에서 꺼져가는 민족정기를 살려내고 민족애 함양을 위한 고민과 험난한 모색을 해야 한다.천황을 신봉하는 입헌군주제의 일본보다도 아예 지난 역사와 단절해서 왕실을 뒤집어 엎은 한국, 중국 등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이유는 도덕적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명예혁명은 군주제 소멸에 반대했다
영국의 명예혁명 당시 영국의회 장로파가 군주전제주의도 반대했지만 군주의 역사적 소멸에도 반대한 까닭 역시 도덕적 구심점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렇다고 입헌군주제의 향수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문제는 전통적 가치의 부활이다. 정부의 잘못을 국가의 잘못으로 오인해서 나라장래를 비관한 나머지 이민 갈 궁리를 하고, 다수의 젊음이 소수의 노년층을 급하게 윽박지르고, 소위 코드가 맞다는 소수세력이 격하게 다수를 몰아세우고, 반대로 다수의 논리가 소수를 다그치는 마당에 민족정신의 근간인 충효사상은 더 이상 의미를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입헌군주제가 아닌 나라에서 도덕적 구심점이 따로 마련될 리도 만무하고 방법은 오직 급하고 격하지 않게 아주 천천히라도 애국, 애족의 민족사상을 살려내는 길뿐일 것이다. 우리가 못다 한 것은 대를 넘겨서까지 이 일은 반드시 해야 할 민족적 과제다. 조금도 거창해 보이거나 교과서적 얘기가 아닐 것이다. 나라 장래를 연다면서 다수가 절대로 소수의 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소수도 당연히 다수의 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다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각해서 민족혼의 뿌리를 지키고 가꾸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를 뒷받침 할 국가시스템마련이 시급하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