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정치와 옳은 정치는 분명 다른 것이다. 옳은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시대변화와 관계없이 백성을 상대로 무조건 정직해야 할 것이며 그 믿음을 바탕으로 백성이 안심하고 편히 살 수 있도록 봉사하고 희생하는 덕목일테다. 반면 유능한 정치는 정치를 위해 돈 만들 줄을 모르면 안된다. 다만 돈을 챙기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게 곧고 정직하기만 한 것보다 훨씬 돋보일 수 있는 리더의 덕목으로 간주됐던 것이 사실이다.지난 60~70년대 전통 야당을 대표하며 이른바 ‘사쿠라’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유진산 신민당수가, 또 유신정권의 엄호를 받았던 이철승 당시 신민당 대표를 무능한 정치인이었다고는 아무도 말 못할 것이다. 야당정치가 정권과의 ‘커넥션’ 실체가 드러나면서 선명성 경쟁을 촉발시킨 것 자체는 역설적으로 옳은 정치와 유능한 정치의 충돌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시 사쿠라로 대변된 그 같은 유능한(?)정치를 국민이 혐오했던 결과는 김영삼, 김대중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들 두 사람이 공유했던 카리스마적 리더십은 이때 싹을 틔운 것이다. 그래서 국민이 얼마만큼 득을 봤는지, 또 어느 정도로 손해를 입었는지는 이 시대 더 이후의 나중 역사가 말할 문제다.의회민주주의 대의는 무너지고
그러나 지금 시대가 생산해내는 정치변화는 어째 유능, 무능을 따질 계제도 아닐 것 같고 선명함을 가릴 그림도 아니라서 도무지 뭐가 뭔지 의아하고 혼란스럽기만하다. 아무리 지켜보고 뜯어봐도 유능한 정치는 아닌 듯하고 옳은 정치로는 더욱 믿기지가 않는다.‘카멜레온’처럼 말 뒤집기에 이골이 나 있고, 앞에서는 개혁을 말하며 뒤로는 우리(?)끼리 얽혀서 청탁을 해대는 꼴이 폭로되고, 국가 기관끼리 헷갈려 국민혼란을 사고 있는 정치현실이 정말 기막히다.특히 대통령 직속기구로 돼있는 ‘의문사위’의 비 전향 장기수에 대한 북송권고안이나 남파간첩출신 장기수들의 사망이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라는 결정안은 도대체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대한민국 땅이 맞는지부터 헷갈릴 지경이다. 어쩌면 이 대목에서는 좌파세력조차 낯뜨거워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한나라당 박창달 의원 체포 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고난 뒤 열린우리당 열성 평당원들의 반대표 색출작업은 아연한 나머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아마 의회 민주주의를 대의로 삼는 자유세계에서는 전대미문의 사건일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당론을 정하지 않고 자유투표에 맡겼으면 의원 개개인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야함은 민주정당의 기본이다. 그럼에도 여당의원 46명이 ‘박살당하지 않으려고’ 또 ‘석고대죄’를 피하기 위해 무기명 비밀투표 원칙 정신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투표 공개요구에 일찌감치 무릎을 꿇었다.‘나는 아니다’ 발뺌에 정신없는 다선 관록
더욱 한탄스러운 것은 그 같은 인민재판식의 마녀사냥 발상을 나무라고 제동을 걸 것이라고 기대했던 6선 관록의 국회의장과 5선의 국무총리까지 ‘나는 아니다’라고 발뺌에 정신없어 했던 모습이다. 이런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어렵기만 한 것도 그러하려니와 과거 팟쇼정권의 공작으로 신념과 소신을 버린 것과 오늘의 ‘색출작업’에 굴복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판단이 어렵다.그뿐인가. 젊어야 한다는 인위적 조건이 사실은 후진사회의 변칙 풍조임을 모른채 매사 젊음으로의 세대교체가 시대감각으로 받아지는 중대한 오류를 방치하는 것도 정치변화를 위한 것인지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누군가 말했듯이 개발시대에는 이끄는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럼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의 한국정치가 옳다고 생각할 사람이 결코 많지는 않을 터이고 유능한 정치로 볼 사람도 별반 없을 것이다. 애써 말하면 옳은 정치를 열기 위해 일시적 혼란과 일부 개혁 세력의 반동현상은 있기 마련이며 이를 수습하는 것이 유능한 정치라고 할 사람이 있을는지는 모르겠다.만약 사정이 그러하다면 지금이야 말로 진정 이끄는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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