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을 ‘슬픔과 한이 많은 민족’ 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슬퍼서는 말할 것 없고 기뻐서도 곧잘 운다.우리말을 생각해보면 종(鍾)소리를 듣고도 ‘종이 운다’고 하고 낙엽 떨어지는 소리를 ‘낙엽우는 소리’, 문풍지가 바람에 떨어도 ‘문풍지가 운다’고 한다.또 억지로 하는 일을 ‘울며 겨자 먹기’로 표현했다. 이렇게 울음 많은 민족답게도 우리 조상들은 우는 것까지도 곡(哭)이라고 하여 격식을 만들어 놓았다. 집에 초상이 나면 잘 울어야 효자로 여겨져 심지어 곡비(哭婢)라고 하여 구성지게 잘 우는 울음전문(?) 계집종이 동원되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면 민족사를 온통 얼룩지게 한 전쟁참화, 특히 동족상잔의 슬픔과 더불어 울음은 우리에게 체질화된 것인지도 모른다. 불과 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영화’가 우리네 정서를 대변해 왔었다. 이렇게 볼 때 ‘슬픔과 한’은 우리 민족의 원형질(原形質)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그런 것이 90년대 들면서 이데올로기적 냉전시대가 일견 청산된 듯해서 전쟁의 공포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부터는 우리 사회에 급격한 체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웃고 즐기려는 문화가 사회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는 ‘전쟁’이란 용어 자체를 혐오하면서 멋지게 즐겨 보자는 향락 증후군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겨우 먹고 살만해지니까, 아차 분수를 잊었던 게다. 다시 웃음을 잃어버린 국민
그러다가 21세기의 문턱을 지나는 지금 우리는 다시 웃음을 잃어버린 국민이 돼버렸다.멋모르고 방종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셈이다. 온갖 부패와 비리가 난무했던 것 역시 향락 문화가 지배했던 국민정서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때문에 부패문화 척결과 사회전반의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 마음은 ‘386세대’의 개혁구호를 믿고 힘을 모아줬던 것이다. 이런 천신만고 끝에 참여정부 탄생을 성공시킨 386주역들은 다행히 국민이 진정한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그러나 ‘진보세력’이란 명분으로 결집한 그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또 그려내는 그림이 과연 국민을 주인으로 보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있다. 이는 바득바득 매사를 전쟁논리로 일관하려는 자세가 누굴 위함이냐는 반박심리와 연관되는 것이다.서로 자기 아이라고 우기는 두 여인에게 아이의 다리를 양쪽에서 당기도록 해서 진짜 엄마를 가려낸 ‘솔로몬왕의 지혜’를 빌리지 않더라도, 아이 엄마가 차라리 아이를 뺏기더라도 아픔에 우는 아이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옳은 정치가 정치목표 때문에 국민의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는 이치쯤을 모를 국민이 없다.국민의 아픔이 무시되는 정치는 욕심에 다름 아닐 것이고, 밀어붙이기를 능사로 하는 정치 열정은 천박한 열정에 불과한 것이다. 민족혼이 깃든 문화는 억지로 안돼
일부 ‘386’ 급진세력이 명심해야 될 일은 민족혼이 깃든 문화를 억지로 할 수 없다는 점이다.일제시대에 이어 자유당정권,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민족 명절로 신정(新正)을 권했지만 이중 과세의 폐해 끝에 결국 무위로 끝나서 ‘설날(구정)’이 정해진 까닭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진보’가 뭔가. 긴 설명 필요없이 한마디로 하면 나라의 미래를 열자는 것 아닌가. 그러면서 케케묵은 과거에 매달리고 맺힌 앙금에 열정을 쏟는 작태는 또 뭔가.그런 ‘사이비 진보’의 한풀이 정치에서 얻어지는 것은 갈등과 증오뿐일 것이다.‘돈만 좀 있으면 이꼴저꼴 안보고 이민 가고 싶다’는 도피주의적인 한국인이 유행병 번지듯 하고 있는 현실을 개혁세력이 크게 주목해야 한다.‘진실한 진보’는 목전의 이해를 떠나 역사의 교훈 속에서 구하는 백년대계의 원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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