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물갈이론이 강력 대두된 것은 정치권의 부패 때문이었다. 이는 30년 세월 가까이나 이 나라 정치를 지배해 왔던 3김(金)보스 정치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3김 정치 아래 국회의원 공천 잣대는 보스에 대한 충성도에 기울 수밖에 없었다.때문에 칼자루를 쥔 쪽은 당연히 유권자라지만 공천 물갈이의 거센 요구가 관철되기까지의 과정에는 순수 시민단체의 열정이 큰 몫을 한 것이 사실이다.집에서 기르는 어항 속 물고기도 오래 물을 갈아주지 않으면 역한 냄새가 난다. 물고기도 이런 썩어가는 물에서 살 수는 없다. 사람 역시 공해 속에 살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그러나 오래됐다 해서 무조건 갈아 치울 일만도 아니다. 동네 복덕방 주인은 나이 들고 오래 그 자리에 있었을수록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동네 구석구석의 안방 구들 속사정까지 손금 보듯 알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게다.이런 사정이면 복덕방 주인은 갈아 치울 대상이 아니라 오래도록 붙들어 둬야 든든하다.그런데 정치판의 물갈이가 국민적 여망이 됐던 것은 기성 정치집단의 복덕방 정치가 패거리로 구전 챙기기에 급급해했던 까닭이다. 아마 묵은 정치인들의 경륜이 국리민복에 기여한 흔적이 확실하고 뚜렷했다면 사정은 아주 판이해졌을 것이다.말하자면 ‘애송이들이 나라사정을 뭘 안다고 감히’ 했을 것이고 나이든 정치원로들을 향한 믿음과 존경이 깍듯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정치권의 물갈이를 가까스로 끝내고 나니 이제 물갈이는 인적 영역뿐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해 온 제도 전반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물밀 듯이 밀어붙여지고 있는 상황이다.격하고 획일적인 모습이 물갈이 차원에서 보면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이렇듯 물갈이는 제도적 측면과 함께 굴러가야 완결될 수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 물갈이는 곧 순환을 의미하는 철학인만큼 ‘확 바꿔’는 지난 선거 때 국민정서의 극대점이 됐었다. 때문에 국민은 개혁 대상의 성역을 인정치 않고 반민주적 반개혁적 요소를 속속들이 솎아내 주기를 기대해 마지않았다.하지만 총체적 양상이 국가 정체성을 흔들어대고 국민 생존전략을 암울하게 하는 것이면 물갈이를 위해 함께 살던 집과 터전을 떠내려 보내는 것과 같은 꼴일 것이다. 과거시절 어느 때에 인생의 쓴맛 단맛 다보며 산전수전을 겪어낸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십만명의 국민이 한 장소에 집결해 정부를 향한 격렬한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던가. 이것 하나만으로도 지금의 나라 정치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여길 국민이 없을 것이다. 국론이 극단적으로 양분되고 있는 이 상황을 끝까지 기득권세력의 저항 논리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짓인가를 집권세력이 모르지도 않을 것이다.또한 낯선 동네로 이사할 때의 사람 마음이 나이든 복덕방 주인을 신뢰하는 이치도 알 것이다.대학졸업자 절반 가량이 갈 곳 없어 노는 나라, 하루에 수십명 젊은이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나라, 말만 들어도 섬뜩하지 않은가. 이런 가운데 빚어지는 이념 논쟁이 누굴 위함인가.반드시 북한 당국을 주적 개념으로 들먹이지 않더라도 오늘의 대립 국면을 적전 분란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적전 분란이 맞다면 이보다 더한 이적행위가 또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따라서 국민적 합의를 도외시한 물갈이론은, 특히 제도적 측면을 함께하는 대목에서는 자칫 전부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국론이 충돌해서 생산될 것은 한(恨)과 적개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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