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美)을 창조하고 표현해내는 인간 활동을 예술이라고 할 것이다.그래서 일반적으로 예술이라 하면 학예의 기술로만 인식해서 예능적 경지에 국한돼 온 실정이다. 그런 것이 사회가 다양화되면서 예술의 의미도 다양해지고 뜻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이제 정치행위를 놓고도 곧잘 예술론을 펼칠 정도로 인간 세상은 모든 면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입만 열면 국민을 걱정하는 소리를 내고 애국을 자신의 전유물처럼 내세운 정치지도자의 음험한 속내를 확인했을 때, 우리는 정치를 위선의 예술로까지 표현했을 정도로 정치인의 이중구조에 경악했었다.그렇게 받은 충격이 쌓이면서 우리는 이 땅의 정치를 불신하다 못해 혐오하기에 이르렀었다. 급기야는 국회 무용론이 대두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이 빚어지면서 국민은 ‘선거혁명’에 돌입했다.2002년 대선은 노무현 대선후보 조차 썩 자신 있었던 선거가 아니었다.허벅지 살을 꼬집어보고서야 세상 바뀐 걸 실감할 수 있었다고 했다. 감격하는 표정에는 정말 국민을 하늘처럼 여기겠다는 의지가 결연해 보였다.상대적으로 취약한 정치기반 위에서도 참여정부가 별다른 저항 없이 빠르게 권력 장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의 그 같은 의지를 신뢰한 국민 성원이 작용해서였다. 그리고 내친 김에 실질적인 지배세력 교체를 서둘다가 어렵사리 대통령 탄핵정국을 불러냈고, 그걸 기묘하게도 국회권력까지 장악하는 단초로 활용하는 가히 한편의 정치드라마를 엮어냈다.이는 정치가 가능의 예술임을 입증한 대사건이었다. 또한 무너져 내리는 한나라당 간판을 끌어안고 전국 골목골목을 누벼서 힘겹게 오늘의 한나라당을 있게 한 박근혜 대표의 소박한 정치 열정에서도 정치가 가능의 예술임을 느낄만 했다.그러나 이후의 정치상황이 어떠한가. 여권은 저항세력 반대론자들을 향해 증오를 보내고 적개심에 불 타 있다. 오직 내편(우리)이 아니면 모두가 적이라는 관점에 갇혀있는 집권층의 ‘증오정치’가 더 이상 가능의 예술로 승화될 방법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독재정치에 신물 나 있는 국민이 어떤 명분으로도 독선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다.한나라당에 대한 지지율 답보현상 역시 민심의 괜한 반응이 아닐 것이다. 누구 덕에 국회의원 배지 달아놓고는 이제 와서 무슨 연유에서 대표를 흔드는 모양도 가관이거니와, 보수 본류라는 정당이 여권의 밀어붙이기에 맞설 대안 하나 시원하게 못내 놓고 있는 주제를 탐탁하게 볼 리가 있겠는가. 확고한 모습에 확실한 대안으로 여권과 대결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야당이 궁지에 몰려 국민을 불러 댄다고 해서 돌아 볼 국민이 얼마나 되겠느냐 그 말이다.인간사회 철학이 사람이 모이면 분란이, 재물이 모이면 분쟁이, 사건이 모이면 문란해지기 마련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치가 존중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가 오히려 국가적 분란을 일으키고, 사회적 분쟁과 문란을 야기시키면 국민은 당연히 정치를 혐오하고 저주할 수밖에 없는 이치다. 또 정치가 위선의 가면을 보일 때도 국민은 속지 않으려고 싸우게 된다. 또한 정치가 혼란해지면 국가 요직에 대한 집권자의 인사 잣대가 능력위주에서 벗어나 충성심 쪽으로 기운다는 사실도 국민이 우려하는 중요대목의 하나이다.혹시라도 지금 집권세력의 초조함이 한 쪽이 무너지면 주변이 다 무너진다는 ‘도미노이론’에 빠진 까닭이면 더욱 큰일 났다는 생각도 든다.많은 국민들이 아직도 정치가 나라경제를 비롯한 모든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의 예술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절대로 미래를 포기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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