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어느 기업 노조가 붉은 머리띠를 풀고 스스로 내년 임금 인상을 동결하겠다고 결의했다.내부 반대가 없지 않았을 텐데도 어려운 경제 여건에서 미래 지향적인 경영을 해 달라며 내린 결정이다. 경영진은 또 오히려 예년 수준의 임금 인상에 격려금을 붙여 지급키로 하는 화답을 했다고 한다.이는 지금까지 기업 현장에서 볼 수 없었던 하나의 사건이다. 사건이랄 수밖에 없는 것은 온통 우리사회가 전쟁논리와 투쟁 전략으로 뒤덮여 있는 가운데서도 상생의 아름다움이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어렵게 확인됐기 때문이다.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이 상생의 근본임을 모를 사람이 없다.그러나 상대를 배려하고 몫을 양보한다는 것이 절대로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은 더 볼 것 없이 근래 나라 사정이 웅변하고도 남을 일이다. 더욱이 절실한 이해 문제로 대두되는 대목에서는 서로를 증오하는 눈빛에 섬뜩한 살기가 배어나기도 한다.양보하면 곧 죽기라도 하는 줄 아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오늘의 정치권이 이럴 수가 없다. 저들의 이해는 뻔한 것이다. 집권여당은 대통령의 말처럼 100년 가는 정당으로 남기 위한 초석을 다지는 일이 지상의 목표이자 궁극의 과제일 것이다. 그러자면 기득권 세력을 철저히 제압해서 우선 판을 뒤집어야 한다는 생각에 추호의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지배세력을 교체치 못하면, 100년 정당은 고사하고 얼마 멀지 않은 장래에 당 간판이 내려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당연히 가질 법하다. 바로 그러한 강박관념이 더욱 집권세력을 초조하게 하는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한나라당 또한 저들의 페이스에 말려들거나 기 싸움에 밀리면 더 볼 것 없이 끝장이라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적전 내홍이 심각한 양상이다.여론의 압박이 워낙 드세지자 가까스로 국보법 대체 법안이란 것을 며칠 전에야 발표한 한나라당이다.한나라당 사정이 이러니 계속 밀고 들어오는 여당의 파상공세에 민첩하게 대응해낼 전략이 있을리 없다.양쪽 모두가 리더십 부재라는 질책들을 언론이 많이 하고 있지만 쌍방의 당내 역학관계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들 체제적 한계를 쉽게 읽을 수가 있다. 17대 국회는 과반이 훨씬 넘는 초선의원들이 거대한 정치세력으로 지분을 인정받아 굵고 큰 목소리로 연일 지도부를 공격해댄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열린 정치의 대명사처럼 돼있는 그 같은 현실에서도 지도부가 여간 골 아픈게 아닐 것이다.자중지란에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그걸 잠재울 만한 그 어떤 카리스마도 없는 현실이다.이런 모양의 정치권이 언제 내분을 수습해서 국민과 함께하는 상생정치의 틀을 만들어 낼 것인가. 설사 그들 수뇌부가 힘들게 국회 정상화를 선언하고 다시 원탁에 앉아 대립 사안에 합의하는 모습을 지금 당장 연출해 낼 것이라고 해도 이제 더는 정치를 믿겠다는 국민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국민은 급기야 밀어닥친 경제 불황과의 싸움이 정치권도 정부 경제부처도 아닌 국민 자신이 스스로 싸워 해결해야 할 몫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는 싸움에 지쳐있는 정치권이 어쩌면 내심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일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명절 때 민족적 대이동이 일어나고 월드컵 축구 신화를 엮어낸 우리 국민의 저력을 정치권이 주목치 않을 리 없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이 어려운 경제난은 국민 스스로의 싸움으로 돌려놓은 채 여당은 100년정당의 초석 마련에 열 내느라 얼굴들이 벌겋다. 또 제1야당은 대안 없이 제살 깎기에 얼굴 붉히는 모습이 하나같이 제 정신들이 아닌 것 같다.정치권이 정말 얼굴 붉히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어느 기업현장이 보여준 상생의 귀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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