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연말 집권 1년10개월여를 돌이켜 보면서 ‘해놓은 일은 없는데 나로서 비롯된 일이 너무 많았다’ 고 했다. 대통령은 이게 맞다 하는 일도 하는 과정이 매끄럽지도, 세련되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특히 대통령은 언론과의 관계를 ‘새해에는 건강한 긴장관계 뿐만이 아니라 건강한 협력관계로 갔으면 좋겠다’면서 ‘분위기를 바꾸도록 노력하겠다’ 고 다짐했다.열린우리당 지도부가 겨우 한나라당과 합의한 4대법안 합의처리 방침이 당내 강경파들에 의해 깨지고 난 뒤의 연말 국회 모습은 그저 가관이었다는 표현 외에 달리 할말이 없었다. 물론 많은 국민들이 여야 4자회담 하나로 시원하게 정국의 물꼬가 트일 것이라고는 애초부터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여당이고 한나라당이고 간에 당 내부의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상당수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당이 휘둘리는 모양새와 양당 지도부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국민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들 역시 언제나 입으로는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달고 다녔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국민 마음을 모를리는 없을 것이라고 믿는 구석이 조금은 있었던게 사실일 것이다.더구나 한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준비해야 할 시점에 정치를 깽판 내는 일은 모두가 자제해 줄 것이란 희망 섞인 전망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혹시나 했던 기대는 곧 역시나의 허망함으로 나타나고 말았다.먹고 살기는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누구도 믿을 곳이 없게 된 국민들 생각은 뻔하다. 도대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자는 건지에 대한 속내를 깊이 들여다 볼 겨를도 없지 싶다. 어떻게든 좀 먹고 살도록만 해주면 그 외의 정치 현안은 자기들끼리 구워먹든 삶아먹든 별 상관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들일지도 모를 일이다. 자칫 국민 자신들이 무서운 패배주의로 빠져드는 줄을 미처 깨닫지도 못한 채 말이다. 사람이 패배주의에 빠져들면 미래를 포기하게 된다. 미래를 포기한 사람 눈에 비춰지는 세상 그림은 하나같이 증오의 대상일 수가 있다.그럴 때 우리사회는 섬뜩한 살기가 느껴지고 공포에 휩싸여 전전긍긍케 되는 삭막한 세상이 될 밖에 없다. 이는 과거 독재정권이 만든 공포사회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때는 제 아무리 닭 모가지를 비틀어대도 반드시 새벽이 온다는 신앙 같은 확신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느 한 곳도 기대고 의지할 구석이 안보인다.다른 나라에서는 새해에는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는 청사진을 잘도 쏟아내고 있는데 이 땅에서는 죽고 살기식 싸움질에 영일이 없는 자화상만을 만방에 과시하는 형국이었다. 이러니 이꼴저꼴 보기 싫다고 아예 내 나라를 떠나는 국민을 나무랄 수도 없을 노릇이고, 절망해서 삶을 포기하는 사람에게 혀만 찰 처지도 아니었다. 그런 차에 대통령이 지금까지 입장에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집권 후의 소회를 밝히는 대목에 진솔한 회한이 느껴지고, 국민의 아픔을 이해하겠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런 대통령의 모습은 분명히 국민으로 하여금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하는 마음을 갖게 했을 것이다. 더 볼 것없이 최근까지 20%대를 맴돌던 대통령 지지도가 하루아침에 수직 상승한 당장의 여론조사 결과가 조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친노(親盧)그룹’은 꿈쩍도 않으니 정말 괴이하고 고약한 일이다. 이들은 국회를 온통 ‘운동권 농성장’으로 만들어 놓고 밖으로는 ‘노사모’의 궐기를 촉구한다. 이 무슨 이율배반적 작태인가 싶기도 하고, ‘국회농성이 결국 노대통령을 돕는 것’이라는 여당의원의 말에서 또 다른 함수가 엿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국민을 헷갈리게 하는 정국이 오래가면 많은 국민이 또 절망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국민을 절망토록 하는 일이 ‘대통령을 돕는 일’이라는 해괴한 논리에는 국민이 할 말마저 잊을 것 같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