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이든 집단이든, 무슨 일에 부닥치면 모두가 그때의 주변 상황을 고려해서 최선으로 생각되는 해결 방법을 찾게 된다. 또 발전을 위해 나가야 할 방향을 정할 때도 반드시 현실성을 전제로 할 것이다. 현실성이라 함은 더 말할 것 없이 시대적 흐름, 즉 주위 여건을 지배하는 현실의 사회적 가치를 따지는 말일게다. 이를테면 사람이 기아에 허덕일 때는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빵을 만들어 우선 배를 채우도록 하는 것이 최선일 테다. 하지만 배부른 현실에서는 빵이 그렇게 귀하고 소중해 보일 리 없다.오히려 빵을 얻기 위해 체면을 잃고 때로 양심을 저버리기까지 했던 그 시절의 부끄러운 측면을 다시 빵과 바꿀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게 사람이 간사해서가 아닐 것이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 속내의 변화무쌍함을 태생적 한계로 여긴 까닭일 것이다.따라서 배고프면 먹이를 쫓고, 배부르면 더 폼(?)나게 사는 법을 찾는 일에 따로 구별이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갈등현상이 빚어지는 이유는 저마다 세상사는 가치 중심을 어디에다 두느냐 하는 문제 때문일 것이다.세상 전체가 신의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시대에서는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홍수가 져도 그 자리에 있다가 죽은 사람이 훌륭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반면에 약속자리를 피해서 목숨을 건진 사람은 못 믿을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록 지난날 신의 없다고 외면 받은 사람이라도 훗날 현실적 어려움을 타개해 낸 탁월한 능력이 인정되면 문제는 확연하게 달라진다. 많은 사람이 그의 능력을 칭송하며 업적을 기리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세상이 달라지면 평가를 바꾸려 드는 흐름이 일어난다. 이때 흐름의 주체가 어디냐는 대목이 미래 역사에 아주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 틀림없다. 역사 기록은 승자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당연히 비겁해 보여야 할 기회주의가 실용주의, 현실주의로 포장되기가 십상이다. 그런가하면 신의의 실천이 편협과 무능으로 추락하는 경우도 적잖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지금 새로운 논쟁거리로 등장한 구시대의 새마을 운동이 당시 국민정서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났다. 그때의 국민일체감을 누구도 아니라고 말 못할 뿐더러 그 성과를 감히 부인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지난날의 향수 때문인지 경상도 청도 땅 어디에 있다는 새마을 운동 발상지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기도 한다. 또한 지구촌 개발도상국들이나 일부 선진국에서까지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국가성장 모델로 연구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지가 오래다.그러나 정작 이 땅의 사정은 지금 전혀 그렇지를 못하다.한강의 기적을 시샘 받을 정도로 국가적 부가가치를 생산했던 새마을 운동이 독재정권의 정권보위 수단이었다는 평가가 버젓이 우리 쪽 교과서에 오를 지경이 됐다.환한 빛을 발산해내는 그 어떤 것에도 어두운 측면은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나랏일에 국민적 호응이 거센 불길 같아져 태산준령이라도 무너뜨릴 태세이면, 집권세력이 정권차원의 또 다른 욕심을 내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일 것이다. 그 같은 속성상의 측면적 문제를 새로운 권력이 또다시 정권 차원에서 재조명하려 들면, 우리는 앞으로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 뒤집기로 날을 지새야 할는지도 알 수 없을 일이다.만약 그렇게 돼서 그때마다 가치 기준이 흔들리고 모호해지면, 국민은 또 그때마다 갈등하고 서로 찢어질 수밖에 없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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