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민족문화를 설명 할라치면 이 땅의 고유한 전통의 선비 정신을 말해야 한다. 우리 선조들이 얼마만큼 대쪽 선비의 기개를 흠앙하고 그 정신을 숭상했는가를 모를 사람이 없다.선비 대접을 받는 집안에서는 조상의 이름을 훼손하지 않고, 또 후손들에게는 조상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훼손하지 않고자 애쓴 흔적이 눈물겹다.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부귀영화를 등지고 밥을 굶었으면서도 잇새를 쑤시며 초연한 삶을 산 선조들 이야기가 무수히 많다. 이름을 지키려고 목숨을 던진 사례도 드물지 않다.큰 짐승은 죽으면서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옳은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의 발로가 선비들의 정명사상을 더욱 견지토록 한 것이다. 서슬 퍼런 왕권과 경국대전이 정한 강제규범으로 다스려졌던 옛 조선왕조 시대에도 전통 지방자치제의 규약이랄 수 있는 향약(鄕約)이란 게 있었다. 향약은 지방 수령들이 정한 것으로 각 고을마다 백성들의 도덕적 해이와 전통문화 훼손을 막는데 크게 기여했다.향약에는 규약을 어겼을 때 가하는 벌칙 등급이 정해져 있었고, 형벌을 가하는 방법은 양반과 상민을 달리했다. 예컨대 아버지 앞에서 큰 소리로 대들거나 상(喪)을 당한 사람이 술에 취해 주정을 하면 아주 상벌(上罰)에 해당됐다. 이때 그 신분이 상민에 속하면 태(笞)를 치고, 양반이면 많은 사람 앞에 자기이름을 써 들고 앉아 있게 했다. 이 같은 명예형벌을 만좌명책(滿座名責)이라 하여 향약이 가할 수 있는 최고의 형벌로 삼았다. 이처럼 이름을 공개, 훼손하는 것이 어떤 체벌보다 더 중형이었음은 이름을 얼마만큼 중시했는가의 단적 증거랄 수 있다. 말하자면 몸을 다쳐 병신이 되는 것은 극소사(極小事)요, 이름을 훼손하는 것은 극대사(極大事)였던 것이다.이런 정명사상은 현대에 이르도록 이어져 왔다. 국산품 애용만을 부르짖던 과거시절에 양담배를 피우면 명단 공개를 한다고 했던 것이나, 상습 부동산 투기자의 명단을 공개한다는 것, 원조교제자의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것 등이 모두 정명사상적 발상이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황금만능주의의 배금사상(拜金思想)은 이름을 바르게 유지한다는 정명사상을 완전 누더기처럼 찢고 말았다.이런 판에 이름에 형을 가해 치욕을 준다 해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 것인가? 오히려 우려되는 바가 커질 것 같은 예감이다. 우려할 만한 징후는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법치국가에서는 도저히 합리화 될 수 없는 인민재판식의 여론몰이가 개인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한다. 입으로는 선진한국을 화두로 꺼내면서 정작 선진국이 더욱 중요시하는 프라이버시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음은 덫을 자초하는 격이다.지금까지 우리가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만했던 것이 정명사상의 선비정신이었다. 그럼에도 이름 더럽히는 것에 개의치 않는 현실이 앞으로 나라를 어떤 모양으로 해 놓을지를 생각하면 스스로 덫을 느낄만 할 것이다.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꺼져가는 정명사상의 복원이다. 그것이 사회도덕 회복의 기초가 될 것이고, 기회주의 배금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첩경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삶의 질을 높인다는 뜻이 잘못 이해되는 경향이 짙다. 질 높은 삶이 첨단 과학문명이 이끄는 풍요로움과 즐거움을 만끽하자는 목표만일 수가 없다. 나는 오늘 조상의 이름을 지키고 내 이름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일념에서 살아간 우리 선조들이 오히려 오늘보다 훨씬 질 높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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