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우리 어른들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상머리에 앉아 느긋이 기다릴 줄 알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손이 가고 시간이 걸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격렬하고 급한 민족성과는 아주 딴판이었다.가장 기본적으로 김치가 묵어질 동안 기다리고 불고기감을 양념할 때도 숙성되기까지 식욕을 억눌러 참는 것이 다 좋은 맛을 얻기 위함이다. 이 땅 도처에는 급하고 빠른 것을 좋아하는 우리네 습성을 소재로 한 해학적 얘기가 얼마든지 많이 있다. 그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다. 한 시골양반이 사윗감을 고르는 조건으로 매사에 부지런하고 서두르는 놈을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총각 한 녀석이 뒷간에 드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이 녀석 허리끈 풀 생각은 않고 주머니칼을 꺼내 끈을 싹둑 자르는 게 아닌가. 시골양반 옳다 됐다 싶어 일 끝내고 나오는 녀석을 붙들고 사위가 돼 달라하니 녀석이 쾌히 응낙했다. 내친김에 한 달 안에 혼례 날을 잡자고 하니 이 녀석 깜짝 놀라서 “한달씩이나요? 그럴 것 없이 오늘밤으로 해치웁시다.” 한다. 서두르는 꼴이 여간 맘에 드는 게 아니다. 이 양반 그저 좋기만 해서 그날 밤으로 찬물 떠놓고 혼례를 치르도록 했다.신랑 신부 신방에 넣어주고 사랑에 앉아 있는데 느닷없이 신방에서 딸의 비명소리가 자지러진다.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사위 녀석 빗자루 몽둥이를 거꾸로 들고 딸을 개패 듯하고 있다. 놀라서 이 무슨 행패냐고 호령하니, 녀석 하는 말이 동침을 했으면 애를 빨리 낳아야 할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무슨 일이건 빨리 서두를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자기네 민족성을 빗댄 이런 우스갯소리가 우리 말고는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오늘 할 일은 오늘 하라는 것이 우리나라의 교훈적 가치다. 서두르는 것이 생존의 가치관으로 정착돼 있는 우리에겐 오늘 못하면 내일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은 곧 패배를 의미하는 관념이다.우리 젊은이들이 인스턴트식품에 쉽게 길들여진 것도 ‘먹고 싶을 때 금세 먹을 수 있는’ 조급함의 발로일 것이다. 매사 서두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성급함이 이제 이 나라 정치문화까지 ‘인스턴트 정치’화 한 느낌이다. 당장 눈앞에 성과를 드러내지 않는 정치행위는 가치를 둘 생각도 않는다.때문에 억지로라도 국민 시선을 끌어내려는 ‘이벤트 정치’가 무슨 시골 장터의 야바위 놀음을 연상케 할 때가 있다.그걸로 양이 안차서 급한 국민 입맛을 금세 맞출 인스턴트 정치가 행동하는 선명한 정치로 돋보이는 현실이 돼 버렸다.독도문제에서도 당초 우리정부는 절대로 감정적 대응을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그런데 실제 대처는 세계가 놀랄 정도로 인스턴트 식이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누구도 오늘의 우리의 대일본 전략이 미래 지향적이라고 보지는 않을 게다. 며칠전 이해찬 총리가 일본문제를 추궁하는 국회 답변에서 ‘개가 짖으면 계속 짖도록 내버려 둬야한다’고 말한 것도 그렇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대안 빈곤을 느낀 나머지 사려 깊지 못한 막말을 또 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지금 여야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른바 ‘유전게이트’에 관한 야권의 특검 주장에 대해서도 여론의 눈길이 썩 반기는 눈치만은 아니다. 일단 검찰이 결연한 수사의지를 거듭 밝히고 있는 마당이다. 특히 이번 사건은 김종빈 검찰총장체제의 첫 시험무대 성격이 짙다. 야권도 검찰의 그 같은 분위기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앞장 선 야권의 특검제 발의는 인스턴트식 정치공세로 폄훼 받을 소지가 더 강하다는 생각이다.김치가 묵어 제 맛을 내도록 기다리는 지혜가 우리에게 너무 아쉬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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