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개혁의 목표는 낡은 제도를 버리고 발전적 대안 마련으로 인간 삶의 질을 높이자는 데 있다.이처럼 추구하는 목적이 잘못된 문화를 벗어나 질 높고 고급화된 제도아래 만인이 평등하게 복된 생활을 향유케 함이라는데 개혁을 마다할 이유는 털끝만치도 없는 것이다. 소수 개혁세력이 급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같은 충만해진 변화 욕구 때문이었다.그래서 개혁세력에 표를 몰아줬고, 다시 수구세력의 준동에 내몰렸을 때도 국민은 그들을 감싸서 지켜냈다. 그리고 개혁성과로 선진한국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해 마지않았던 국민 마음이다. 그랬는데 지금 이 땅 돌아가는 판세가 말이 아니다.보이느니 싸움판, 눈치판, 죽을판이다. 그럼에도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이라고 단숨에 부러지는 진단을 할 수도 없다. 세력간의 주장을 들어보면 저마다 명쾌해 보이는 듯한 논리가 있다.또 국가 민족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는 어김없는 명분이 있다.더욱이 정치란 명분을 습생(濕生)으로 하는 생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정치권의 치열한 정쟁은 순간 가라앉았다가도 언제든 불씨가 살아나게 돼 있다. 그런걸 싸움질 하는 꼴이 보기 싫다고 정치하는 집단을 통째 백안시해서 될 국민 처지도 아니다. 싫든 좋든 국가집단은 정치적 성과를 자양분으로 해서 성장의 역사를 쌓는 것이다.정치변화를 바라는 국민열망이 거세졌던 까닭이 따로 있지 않았다. 좀 더 능력 있고 현실 대안이 뚜렷한 개혁성향의 인물들이 정치일선에 나서 선진 정치로 이끌 것을 기대해서 국민이 힘을 실은 대가가 참여정부 성사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당선 실감을 못해 살을 꼬집었다는 말로 감격을 표현했다.국민은 그 같은 배경에서 나라가 퍽 시끄러워질 것이란 충분한 전망을 할 수 있었다. 보수진영과 진보그룹간의 격돌이 불가피해지고 기득권의 발호가 대단해질 것이란 판단을 일찍 못했을 리 없다. 때문에 우리 국민들 얼마간 각오한 바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라가 온통 누더기처럼 찢어져 죽고 살기식의 힘겨루기 판을 벌일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게다.그건 민주주의 정치권력의 모태가 국민이라는 강한 인식과 믿음을 국민 스스로 배척하기 싫은 맥락과 무관치 않다. 국민은 나라 역사가 만들어낸 민족문화를 에너지로 정신적 무장을 하고 있는 객체다. 그러기에 국가제도는 민족문화에 맞춰져야 하는 것이다.이는 역사가 문화를 낳고 문화가 새로운 역사 발전의 추동력이 되어 끝없는 상호작용을 하는 까닭이다.그럼 오늘의 정치권이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가 곧 정의이니 오직 우리를 따르라고 오만을 부릴 하등 이유가 없다. 오만이 용납 받기에는 오랜 역사 속에 피어난 우리 민족문화가 너무 슬기롭다. 슬기로운 문화는 그 나라 국민의 우월성을 나타낸다. 정치권은 우월한 국민이 잘못된 정치에 그저 맥 놓고 끌려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민심은 이미 지난 4·30 재보선을 통해 여야 모두에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오만에 빠진 여당에 과반의석을 허용치 않겠다는 강력한 표심이 드러난 가운데 야당에도 위기를 경고하는 메시지가 확연했던 선거였다. 그 직후에 여야가 머리를 맞대서 내놓은 첫 작품이 과거사법 합의다. 놀랍게도 을사조약 이후 최근까지 100년간의 주요 사건들에 대한 학문적 진상규명 작업이 정치권 주도로 범죄 수사하듯 이루어지게 됐다. 이대로면 국민은 앞으로 훨씬 더 피 냄새 풍기는 싸움판을 관람해야 할 것이고, 눈치판의 눈알 굴리는 허여멀건 모습들을 역겹지만 또 봐야 할 것 같다. 죽을판을 되뇌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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