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양극화 현상이 심각하다는 것은 현 정권 초기 화두였던 상생정치가 말짱 허구였다는 증좌에 다름 아닐 것이다.상생(相生)은 같이 살자는 뜻이다. 그런데 이 땅 정치 현실부터가 모조리 상극논리에 젖어들어 상대 죽이기에 오로지 혈안이다. 어제까지 기꺼운 마음으로 동지애를 과시하고 한 이불속에 동침했던 사람들이 오늘 보니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을 것 같은 모양이다.갈고닦은 정치 묘술이 망라되는 듯한 정치꾼들의 이런 모습이 급속히 전수되는 효과는 사회조직 전체가 너도나도 ‘코드’타령이다.‘혜란’이 불에 타면 ‘난초’가 슬퍼하고 소나무(松)가 무성하면 잣나무(紅松)가 기뻐한다는 말이 있다. 오늘의 우리네 형국을 바라보는 난초의 슬픔이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왠지 소나무 숲에 자라는 잣나무의 즐거움이 갑절은 더할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든다. 국민이 한탄하는 바가 이런 생각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한(漢)의 유방과 초(楚)의 항우가 천하 패권을 다툴 때 유방 뒤에 한신(韓信)이 없었다면 초한의 역사는 아주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직 천하의 향방을 알 수 없을 때 ‘괴통’이라 불리는 책사 한 사람이 한신에게 유방에게서 벗어나 자립할 것을 종용한 적이 있다. 이유는 항우라는 적이 있기 때문에 유방이 지금은 한신을 소중히 여기지만 일단 천하가 통일되면 한신의 존재에 오히려 위협을 느껴서 해를 가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양대 세력 사이에서 살아남을 작전도 세밀하게 일러주었다.그러나 한신은 대의가 아니라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유방에 의해 전한(前漢)시대가 열리자 아니나 다를까 한신의 존재가 방해가 되기 시작했다. 서서히 궁지에 몰린 한신이 급기야 모반을 일으켰다가 실패해서 처형당하는 순간 ‘그때 괴통의 말을 들었다면 이런 일은 안 당했을 텐데’라며 탄식했다.한신의 마지막 말을 전해들은 유방은 당장 책사 괴통을 잡아들였다. 유방의 호통에 괴통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그렇소, 한신이 내 계략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파멸하고만 것이오’한다. 유방이 화를 참지 못해 ‘이놈을 가마솥 형벌에 처하라’고 소리치자 괴통은 ‘엉뚱한 누명을 씌우지 마시오’라고 항변한다.‘반역을 가르친 것이 명백한데 무엇이 누명이냐’는 유방의 추궁에 괴통은 ‘진나라 멸망 후 천하에는 많은 군웅이 할거해 제각기 천하통일을 지향하는 마당에 나는 한신을 섬기고 있었고 폐하에 대한 것은 알지도 못했소. 통일을 이룬 것은 폐하지만 폐하처럼 천하통일을 도모했던 영걸은 많았던 것이오. 다만 힘과 운이 미치지 못했을 뿐인데 이들을 모두 가마솥 형벌에 처할 참인가요’한다.유방은 괴통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때부터 지천으로 널린 정적들을 포용했다는 것이다. 상황이 바뀌었을 때 지난날의 적대자를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적대자일지라도 자신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관계를 언제까지나 지난날의 적대관계로 구별하려 든다면 적은 수없이 늘 수밖에 없다.유방은 넓은 도량과 사람을 부리고 구하는 탁월함으로 천하통일에 성공했다. 오늘의 우리정치가 적대자의 명분을 납득하는 상생의 기본만 알아도 난초를 살린답시고 혜란을 불태우는 우(愚)를 저지르지 않아도 될 것이고, 소나무 숲을 넓히기 위해 잣나무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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