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예식이 끝나자, 공민왕이 강사포(綱紗袍, 왕이 신하들에게 하례 받을 때 입는 붉은빛의 예복)로 갈아입고 가마에 올라 본궐로 돌아오니 승평문에서 남아 기다리고 있던 백관들은 마중 나와 두 번 절하고 왕을 맞아들였다. 이로써 기나긴 하루의 제례는 끝났다.
이윽고 공민왕은 어전회의에서 몽골인의 풍습인 변발을 풀었다. 충렬왕 4년(1277) 개체령을 발표하여 나라 전체에서 시행하도록 했던 변발을 75년 만에 공민왕이 먼저 푼 것이다. 이 소식이 조야에 전해지자 온 백성이 모두 크게 놀라 환호작약했다.
“공민왕이 호복(胡服)을 입고 변발을 하는 것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니 금지하라는 감찰대부 이연종의 건의를 따랐다는구먼!”
“공민왕은 과연 영명하고 대단한 분일세. 원나라의 압제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 아니고 뭔가!”
“자주국 고려의 체통을 세울 만한 영걸이 나왔으니 지하에 계신 태조 대왕과 열성조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야!” 
이어 공민왕은 권문세족들의 세력 기반으로 인사행정을 맡아오던 정방(政房)을 전광석화처럼 폐지하였다. 이는 그동안 권문세족에게 빼앗겼던 조정의 인사권을 되찾고 새로운 인재등용을 통해 나라를 중흥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전격적인 정방의 폐지는 부원세력들에게 기득권의 상실이라는 아픔을 안겨줬다. 때문에 부원세력들은 공민왕의 일련의 개혁정책에 끊임없이 저항하였다. 
공민왕은 부실한 정치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측근들을 기용하는 고육지계(苦肉之計)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측근들은 권력을 잡자 공민왕을 상대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왕의 개혁 의지를 가로막는 걸림돌 세력이 되고 말았다. 
제일 처음으로 개혁에 저항한 세력은 공민왕이 가장 불우한 시절을 보냈던 원나라에서 그를 보좌한 측근들인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들이었다. 
조일신(趙日新)은 평양 조씨로 할아버지는 몽골어 통역관으로 출세하여 시중에까지 오른 조인규이고, 아버지는 찬성사를 지낸 조위이다. 조일신의 가문은 고려 후기의 대표적 권문(權門)이 되었고, 원나라의 관직을 갖기도 하여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조일신은 정방이 철폐되자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편전으로 공민왕을 찾아갔다. 그는 공민왕을 배알한 후 얼굴에 홍조를 띠며 말문을 열었다. 
“전하,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정방을 폐지하여 벼슬을 내리는 일이 너무 까다로워졌사옵니다. 충목왕 때도 정방을 폐지한 후 한 달 만에 다시 부활한 전례가 있지 않사옵니까. 정방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옵니다.”
“조 참리, 옛 제도를 회복한 지 며칠도 되지 않아 중간에 번복하게 되면 왕명의 체통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남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전하, 전하께서 환국하실 때 원나라 조정의 권신들이 고려 사람으로 그들과 친족 관계에 있는 자들에게 벼슬을 줄 것을 전하께 부탁드렸고 신에게도 그러하였사옵니다. 전하께서 신의 간언을 듣지 않으시니 제가 무슨 명목으로 원나라 조정의 권신들을 볼 낯이 있겠사옵니까.”
“조 참리, 그대가 원나라 조정 대신들의 크고 작은 인사 청탁을 받고 있음을 과인이 모르는 바 아니오. 그러니 조 참리가 인사 부탁할 일이 있거든 과인에게 말하시오. 과인이 다 들어 주리다.”
“…….”
정방을 부활하겠다는 조일신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날 이후 조일신은 사직을 청하고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이에 공민왕은 그를 달래기 위해 판삼사사 벼슬을 주고 동덕좌리공신의 칭호를 내렸다. 
조일신은 여러 날을 고민하다 마침내 묘한 꾀를 짜내었다. 그것은 반대 세력인 기철 일당을 무력으로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하는 음모였다.
‘그렇다. 기철을 물고 들어가자. 부원세력의 영수인 기철 이하 일당을 제거하면 공민왕의 신임을 다시 얻을 수 있을 거야. 언젠가는 제거되어야 할 기철이니까…….’

이제현의 사직상소

한편, 조일신 일당이 거사를 준비하는 시기에 이제현은 이승로, 윤택, 이공수 등과 향후 자신들의 진로를 숙의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이제현이 문생(門生)들에게 말했다.
“조일신은 필경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한 무리로 난신적자(亂臣賊子)이네. 부원배들을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는데도 금상은 속수무책이네. 이런 하극상을 용인하는 상황에서 개혁시책이 쉽사리 수행될 것 같지 않네.”
이승로가 조심스럽게 조일신 일당의 음모를 예측했다.
“예. 저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조일신이 조정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필시 무슨 큰 흉계를 꾸미고 있음이 틀림없사옵니다. 머지않아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를 일이옵니다.” 
“내 한 목숨을 내놓는 것으로 조정이 반석 위에 놓인다면 이 늙은 목숨 아까울 것이 없네만, 만일 내가 저들의 손에 죽는다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일 것이니 그게 두렵네.”
옆에서 잠자코 있던 이공수가 이제현에게 말했다.
“시중 어르신, 송구하오나 사직상소를 올리시는 것이 어떠실는지요. 자칫 큰 환난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심히 염려되옵니다.”  
“나도 지금 그것을 고민하고 있다네.”
모든 세상의 적은 ‘보이는 적’과 ‘보이지 않은 적’이 있다. 보이지 않는 적은 막기 어렵지만 보이는 적은 적의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면 막을 수 있다. 이제현은 ‘모든 위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은 적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라는 노자의 경구를 생각하며 보이는 적인 조일신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제현은 공민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신을 지켜주는 안전판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늙은 몸으로 거대한 적의 무리를 맞아야 할 운명의 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육감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조일신 일당의 거사에 대한 심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제현은 ⟨법구경(法句經)⟩의 한 구절을 읽었다.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며, 선과 악을 초월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어려움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붓을 들어 사직상소를 쓴 후 공민왕을 알현했다.
“전하, 신이 나이도 많고 건강이 허락하지 않아 감히 정승의 지위를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사직을 윤허해 주시옵소서.”
“과인은 시중의 사직을 윤허할 수 없습니다. 개인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사직이 더 중하기 때문입니다.” 
공민왕이 이제현의 청을 가납하지 않자 칭병(稱病)한 뒤 칩거하고 있던 이제현은 다시 사직을 청하였다.
“전하, 신은 말에서 떨어져 발을 다쳐 거동이 어려워 입궐을 하기가 심히 어렵사옵니다.”
“가납할 수 없습니다.”
거듭된 칭병(稱病)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공민왕은 오히려 이제현에게 추성양절동덕협의찬화공신의 긴 호를 내렸다. 이후 이제현의 사직상소는 꽃피는 봄에 시작하여 무더운 여름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제현은 아득히 보이지 않은 석양 너머에서 이름 모를 자객들의 서-걱, 서-걱 칼 가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것 같은 환청에 사로잡혔다. 그는 밤마다 악몽을 되풀이해서 꾸었다. 또렷하고 무서운 꿈에 식은땀을 흘리고 오한에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나는 날들이 늘어갔다. 
이후 이제현은 집요하게 사직상소를 올린 끝에 반년 만에 공민왕의 윤허를 얻어 사직할 수 있었다. 비록 이제현이 현실정치의 한계를 느끼며 정치 현장에서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그가 고려를 개혁시키겠다는 큰 꿈을 접은 것은 아니었다.

6일 천하로 끝난 조일신의 난

그해(1352년) 8월 초. 공민왕은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
옛날에 임금들은 일심전력하여 나라를 다스릴 때 친히 국가의 정무를 봄으로써 자신의 견문을 넓히고 하부의 실정도 알게 되었으니 지금이 그렇게 할 때라고 생각한다. 첨의사, 감찰사, 전법사, 개성부, 선군도관은 모두 판결송사에 대하여 5일에 한 번씩 계를 올리도록 하라.
이 교서는 국왕이 직접 정무를 챙기겠다는 뜻으로, 조정 각 부서에 대한 장악력을 높여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고려 국왕의 ‘친정(親政)선언’은 짧게는 원나라 간섭 후 거의 100년 만의 일이고, 길게는 무신정권 성립(1170년) 후 거의 200년 만의 일이었다. 당연히 조일신 일당은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에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보위에 오른 이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할 때마다 봉은사(奉恩寺)에 있는 태조의 진전[眞殿, 왕의 초상화(어진)를 봉안, 향사하는 처소]을 찾곤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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