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국민감정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정적인 반면 다분히 폭발적이라는 사실에 이의가 없을 것 같다. 금방 쳐 죽일 것처럼 흥분하다가도 상대의 가련한 모습을 대하면 봄눈 녹듯 마음을 푸는 인간미는 누가 뭐래도 세상 으뜸의 민족이다.무참히 인명을 도륙한 살인마에게까지 얼마간 세월이 지나고 그의 가려졌던 인간내면이 알려지면 동정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쉽게 끓고 금세 식는다고 해서 우리는 스스로 냄비근성을 꼬집기도 한다. 하긴 언제까지고 지난날의 앙금에 매달려 적대하는 감정을 키우고 굳히는 것보다는 쉽사리 감정의 닫힌 문을 열어서 포용할 줄 아는 큰마음이 당당한 자랑거리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만약 우리민족이 여느 민족처럼 무디고 냉철하기만 했다면 우리 역사는 설령 잃은 것이 적다해도 훈훈함을 지니지는 못했을 것이다.때문에 우리는 착한 민족임을 자랑한다. 착하다는 것은 모질지가 못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 정말 우리가 착해빠져서 모질지가 못한 민족인가를 말이다. 모질기로 들면 우리만큼 모진백성도 없지 싶다. 어디서 누군가를 죽일 놈이라고 소리치고 쥐 잡듯이 몰아 붙이기라도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몰려들어 같이 짓밟는 근성, 누구를 추켜세우면 판단 없이 부화뇌동하는 심리, 이런 것들이 대책 없이 착하기만 한 까닭일까? 따지면 무책임의 발로임에 틀림없다.우리말에 미운 놈은 미운 짓만 하고 이쁜 놈은 일마다 고운 짓만 한다는 말이 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밉게 생각하면 하는 짓마다 미워 보이고 곱게 보면 전부가 곱게만 보이는 시각, 편견의 극치를 말함이다. 근자 골프파문으로 끝내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해찬 의원 일이나 최연희 의원 사건이 동일시 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두 사안 모두가 여론재판의 단두대에 올랐다는데서 곱씹을 만하다. 무엇보다도 문제를 유발시킨 당사자들이 사건 전말을 놓고 한 맺히게 억울해하고 있음이 강하게 감지된다. 이전총리는 총리직 생사여탈권을 쥔 대통령의 사표수리로 물러나긴 했지만 본인이나 대통령이나 언론이 조성한 몰이식 여론 분위기에 압박당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차이가 없는 듯하다. 국회로 돌아온 이해찬 의원이 기자는 안 만난다고 했다. 억울해하는 속내가 확연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최연희 의원 또한 자신을 조여 오는 전방위 사퇴 압박에 대해 할 말이 많은 것 같다. 내심을 드러낸 최 의원 얼굴에는 분위기에 침몰당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읽혀진다. 검찰수사와 법원심리과정에서 일말의 동정론을 기대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억울함을 전제해서 말이다.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이 전총리나 최연희 의원이나 간에 턱없는 억지를 부려서 원칙을 도외시할 만큼 그 인격이 저급스럽지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두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보면 세상 존경받을 모범적 가치가 두드러짐이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이 지금 억울함을 못견뎌한다. 그래서 두둔하겠다는 심사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열기 가득찬 분위기에 저절로 제 가슴을 달구지나 않았는지 냉정해질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분위기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은 위험천만의 발상이다. 이야말로 여럿이 한사람 병신 만들기 일쑤인 인권말살의 역발상이 아닐 수 없다. 분위기를 말함은 바람(風)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나 같다. 바람은 언제나 역풍으로 몰아칠 수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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