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 58주년 기념일이었던 지난 17일 아침 이 땅 전역이 물 폭탄 위기에 빠져있었고 이미 침수되어 쑥대밭으로 결딴난 지역이 전국일원에 적지 않았다.바로 그 시간에 국회에서는 제헌절 기념행사가 있었다. 임채정 국회의장은 이날의 경축사를 빌려서 또다시 개헌 공론화를 시도하고 나섰다. 임 의장은 민생현안과 전혀 무관한 개헌 논의에 불을 붙일 정략적 호기를 폭우 때문에 놓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파당의 정략 때문이 아니고서야 천재(天災)였든 인재(人災)였든 국가 재난사태에 직면해서 ‘이른 시일 내 국회의장 자문기구로 헌법 조사기구를 설치하겠다’는 개헌론을 꺼낼 엄두나 냈겠나. 농사도 장사도 다 떠내려가 국민이 울부짖는 마당에 민의의 전당 국회의 수장(首長)된 사람으로서 말이다.임 의장은 지난달 취임사에서도 21세기에 맞는 헌법내용 연구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개헌총대’를 메고 나섰었다. 이때 한나라당이 ‘현정권하에서는 어떤 개헌 논의도 하지 않겠다’고 쐐기를 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 의장이 ‘국회의장 자문기구’를 만들어서라도 밀어붙이겠다고 한발 더 내딛는 품이 수상쩍기 짝이 없다.개헌을 하자면 재적의원 3분의 2가 찬성해야 하므로 한나라당 동의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뚜렷한 현실적 난관을 잘 알면서도 그처럼 하는 데는 반드시 깊은 속사정이 작용돼 있는 것 같다. 임 의장이 여권상충부의 개헌공론화를 조건으로 국회의장직 내정을 받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다 실현 가능성 없는 개헌론을 지렛대로 삼아 정치권 지각변동을 꾀해보겠다는 여권의 속내가 읽혀지기도 한다.한나라당 대 반(反)한나라당의 양강 구도가 현여권 중심부가 바라는 최상의 그림일 것이다. 그러자면 개헌 찬성세력, 개헌 반대세력으로의 정지정리가 아주 안성맞춤일 수 있다. 명분이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정치 에너지 소비를 줄이기 위해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주기를 맞춰야한다는 주장에 큰 이의가 없는 터다. 대통령 5년 단임제의 문제점도 대체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점을 노린 임 의장의 개헌론 불 때기는 더욱 거침없어해 할게 틀림없다.야당의 동의를 얻고 국민 여론을 수렴하는 절차 따위가 무시되는 상황은 곧 목적이 개헌 성과보다는 찬, 반 대립구도 확립에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가뜩이나 경제압박이 심해서 숨차했던 많은 국민들이 물 폭탄까지 맞았다. 어떻게 이해해도 지금 개헌 논의를 일으킬 바탕이 못된다. 총력을 기울여 수재 복구와 민생을 살필 때다. 국론이 여기서 더 분열을 일으키고 여야 극한대립의 심각한 양상이 펼쳐지면 나라 전반이 혼란의 극치를 이룰 것이 자명하다.개헌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헌정사는 불행히도 집권정파의 정략에 의해 누더기가 된 흔적이 너무 많다. 특히 정권말기의 집권 연장수단으로 개헌을 밀어붙인 오욕의 역사가 넓게 서려있다. 또 개헌을 매개로 밀실합의를 이뤄 정파 간 합종연횡하는 모습도 익히 봐왔던 국민들이다. 그래서 집권여당에 의해 개헌론이 제기되면 우선 의심부터 하고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지금 현 정권 임기가 1년 7개월밖에 남잖은 시점이다. 설령 개헌에 대한 수요욕구가 국민 저변에 적잖게 깔려 있었다 해도 집권 세력에 의한 현시기의 개헌 논의는 실의에 빠져있는 민심만 악화시키는 우(愚)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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