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 현직 차관급의 고등법원 부장판사였던 사람이 자신이 25년 동안 봉직했던 법대 앞에 끌려나와 후배 판사로부터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구속 수감됐다. 55년 만에 처음 일어난 사건이다. 고령의 노인들을 제외하고는 평생 보지 못했던 충격적 법조사태가 빚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만 분개할 뿐이지 놀라워하지 않는다. 그만큼 면역이 된 탓이다. 즉 법조계가 이번 사건으로 거대한 폭발을 일으키기는 55년만이지만 폭발의 개연성은 언제나 도사려있던 터였다.
그동안 법조 주변에서 수많은 소송 브로커 사건이 터졌었고 각종 표현물을 통해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세태가 낯 뜨겁게 풍자됐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한 묶음으로 일부 법조인들의 자질문제와 연관지어 매도할 수만 없다는데 우리사회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연(緣)을 소중히 해온 민족이다. 고향이 같다는 이유로 편애하는 마음이 생기고, 성씨가 같아 친근해지고, 출신학교가 같아서 동질감을 느끼는 정서가 사회문화를 지배한 지 몇 세기였는지 모른다. 왕조시대 때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출세하는 조건이 될 수 있었다. 반대로 그 때문에 함께 역적으로 몰려 참화를 입은 경우도 적지 않다.
척족 세도정치가 절정이었던 무렵에는 그 집안 족보가 곧 벼슬자리 연감(年監)이 될 정도였다. 충신열사의 고장이라고 우대하고 역적이 나온 지역이라고 해서 등용문을 막았던 ‘지역연좌제’까지 좁은 땅덩어리에 횡행했었다.
이런 연고주의(緣故主義)는 근세에서 현실에 이르기까지 전가의 보도(傳家의 寶刀)처럼 우리사회에 이어져 내렸다. 군대 갔다가 요행히 동향출신 선임자를 만나서 군 생활을 편하게 했다는 얘기가 조금도 낯설지가 않다. 어느 공조직은 어떤 학맥이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고, 어느 곳은 출신지역으로 갈라져 있다는 소리도 자주 들렸다. 또 성씨가 같으면 더 가까이 느끼려는 속내 따위가 인지상정으로 강변된다.
새삼 세상을 들끓게 한 이번 법조 비리 사건 역시 이 같은 연고를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를 발전시킨 귀착사안에 다름 아닐 것이다. 비리 주역으로 떠오른 조(趙)전 부장판사가 브로커 김씨와 친분을 맺게 된 것이 자신과 연수원 동기로 청와대 고위직을 지낸 박모 변호사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박모 변호사는 브로커 김씨와 동향인 것으로 알려졌다.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사회가 연줄을 찾아나서는 것은 연줄의 효험이 원칙을 뛰어 넘을 정도로 절대적일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있는 까닭이다. 이처럼 연줄을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 사회에서 투명한 공정성과 지고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일이 얼마나 무리한 것인가.
여론은 ‘김홍수 사건’을 검찰과 법원이 얼마나 단호한 의지로 규명하는가에 따라 대한민국 사법의 미래가 걸렸다고 흥분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 공조직이 연줄 족쇄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연고중심 사회에서 연줄 사슬을 끊으라는 말이 스스로 가당찮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쩌겠는가?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가 청산되지 않고서는 이 땅에 제2의 김홍수 사건, 제3의 법조 비리 사건은 언제 또 일어날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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