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패배 후 4년 만에 처음 당 공식 행사에 참석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노무현 정권이 거의 파산상태에 와있다”며 “모든 게 대선서 내가 진 탓으로 자책감이 든다”고 밝혔다. 지난 5일 ‘한나라 포럼’초청 특강에서 이 전총재는 대선자금 사건의 책임을 통감한다며 그간의 소회를 토해냈다. 한나라당을 향한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한나라당의 “불임정당이라는 비관론도, 대선주자들의 지지도가 높으니 이대로 가면 된다는 낙관론도 틀렸다”며 “당이 분명한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진 정당으로 인식됐으면 좋겠다”는 苦言을 했다. 그는 또 “당이 호남에 가서 햇볕정책은 문제가 없는 것처럼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를 봤다”면서 “‘김대중 주의’에 아첨해 호남지지를 얻으려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지역주의’에 편승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추상적인 시대변화보다는 구체적인 깜짝쇼와 네거티브 캠페인이 직접적 패인이 됐다”며 “몇 가지 깜짝쇼나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지금의 한나라당 지지율이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경고를 빼놓지 않았다. 이 전총재의 정계복귀설을 묻는 기자 질문에는 즉답을 피한 채 한 측근이 “정치재개로 오해받더라도 좌파정권 재집권을 막기 위해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생각일 뿐”이라고 선을 그은 것으로 보도됐다.
세간 여론도 그가 박근혜, 이명박 두 대선주자 사이에서 영향력 행사로 ‘킹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측이나 대선 재도전 분석 제기론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이 전총재의 진정성을 믿는 쪽이 훨씬 강해 보인다. 그의 대쪽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한나라당은 국민이 의심치 않으면 이 전총재의 근래 행보를 조금도 미심쩍어 할 이유가 없다. 작심해서 토해낸 苦言들이 정치 도마에 올라서는 곤란한 상황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지도가 10%대로 추락하는 현실에서도 “민심은 흐르는 것”이라고 했었다. 말의 속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측면으로는 후딱 냄비 끓듯 달아올랐다가는 금세 식는 우리 국민성이 야유된 것인지 모른다. 얼마 안 있으면 제 아들들은 기를 쓰고 군대 안 보낸 사람이 더 길길이 뛰며 거품 물고 이회창 후보 아들 병역면제 의혹을 제기하고 공중 전파토록 했던, 4년 전 대선 수법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시중 유언비어 가운데는 진작부터 ‘박근혜 아킬레스건’어쩌고, ‘이명박 X파일’저쩌고 하는 수상쩍기 그지없는 음해성 소문이 아주 그럴듯하게 각색돼 퍼지고 있다. 분명히 진원지가 있을 것 같고 원대한 목적이 도사린 것만 같다. 그만큼 괴 소문이 구체적이기도 하거니와 조직적 냄새까지 풍겨난다.
만약 2007년의 대선 양상이 보수끼리 찢어지고 각종 네거티브 캠페인이 빚어졌다고 치자. 거기다 치밀한 각본의 깜짝쇼가 일어날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지금의 과반에 가까운 한나라당 지지도가 무슨 소용일 것이며 후보 지지율 또한 바람 앞의 등불신세로 급전직하할 것임에 틀림없다. 한나라당 불임정당 비관론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또 어림없는 낙관론에 빠진 한나라당 내부가 피 튀기는 이전투구에 휘말리기를 초조히 기다리는 세력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회창 전총재의 최근 행보를 정치재개의 시각으로 보면 또 하나의 혼란을 자초하는 셈이 된다. 다만 그가 토해낸 아픈 소회를 금과옥조(金科玉條)의 苦言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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