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 내려와도 속수무책?

정경두 국방부장관 [뉴시스]
정경두 국방부장관 [뉴시스]

 

지난 15일 동해 북방한계선(NLL)을 넘어온 북한 어선 한 척이 강원도 삼척항에 정박했다. 어선은 3일 동안이나 동해상에 머물며 아무런 제지 없이 삼척항에 도착한 것으로 확인됐다. 인근에 있던 낚시꾼이 이들을 발견하고 신고할 때까지 군과 해경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북한 민간 어선이 작전 구역을 유유히 돌파해 대한민국 항구까지 다다랐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7년 전 강원도 고성 22사단 GOP 철책이 뻥 뚫렸던 ‘노크 귀순’ 사건이 이번에는 동해 바다에서 재연됐다.

軍, 北 눈치 보며 거짓말만
“조직적 은폐 기획·승인한 사람들 책임 물어야”

군 당국에 따르면 이 어선은 9일 함경북도에서 출항했다. 10일 동해 NLL 북방에서 조업 중이던 북한 어선군에 합류한 어선은 11일과 12일에 걸쳐 위장 조업을 벌였다. 이어 12일 오후 9시경 NLL을 넘어 온 어선은 13일 오전 6시경 울릉도 동방 30노티컬마일(약 55㎞) 해상에서 멈춰 섰다.


기상이 악화되며 표류한 어선은 최단 거리 육지 방향으로 항해를 시작, 14일 오후 9시경 삼척 동방 2∼3노티컬마일(약 4~5㎞)에서 엔진을 끈 채 대기했다. 밤 사이 엔진을 끈 채 해상에 대기한 것은 경계 근무 중인 우리 군의 사격 가능성을 우려한 행동으로 보인다. 이처럼 치밀하게 접근한 어선은 15일 일출 후 삼척항으로 출발해 오전 6시 20분 방파제 인근 부두 끝부분에 접안했다.

‘57시간’의 남하 작전 전혀 눈치 못 챈 軍

북한 어선이 실제로 12일 오후 9시 NLL을 넘었다면 삼척항 정박 시까지 무려 57시간 동안이나 우리 해역에 머무른 것이 된다. 하지만 우리 군과 해경은 어선의 남하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14일 엔진을 켜고 삼척항으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군과 해경의 감시체계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포착되지 않았다. 더욱이 군은 북한 어선의 조업 활동이 늘어난 5월 말부터 남하를 감시하기 위해 경계 작전을 강화한다고 밝힌 바 있다. 북한 어선의 삼척항 접근 당시에도 NLL 부근에서는 경비함이 경계 작전을 펼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소보다 강화된 경계 작전 형태로도 북한 어선 한 척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유유히 대한민국 땅을 밟은 어선 선원들은 15일 오전 6시 50분경 선박과 방파제 등에 머물던 중 인근에 있던 낚시꾼들에 의해 발견됐다. 당시 선원들 중 1명은 인민복, 다른 1명은 얼룩무늬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나머지 2명은 작업복 차림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차림새가 독특한 북한 선원을 본 시민이 “어디서 왔느냐”고 묻자 선원들은 “북한에서 왔다”고 답변했다. 답변을 들은 시민은 15일 오전 6시 50분경 112에 신고를 했다. 신고는 곧 강원경찰청 112 상황실에 접수됐다. 해경은 신고 40여 분 후인 오전 7시 38분경 북한 어선을 동해항으로 예인했다. 당시 상황을 담은 CCTV에는 북한 어선이 해경 경비함에 의해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며 예인되는 모습이 찍혀 있다. 또 군 트럭이 무장 병력을 싣고 출동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해경이 출동한 지 1시간이 지난 뒤였다. 결국 군은 이번 사건에서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한 것이다. 군의 경계 태세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판과 사건을 은폐·축소하려 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대공 용의점’ 없다지만…커지는 불신

선원들의 신병을 확보한 군은 이들이 모두 민간인으로 1차 확인됐다고 발표했다. 대공 용의점 역시 없으며, 처음부터 귀순 의도를 가지고 출발한 2명은 남기고 귀환을 요구한 2명은 북한으로 송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행히 별다른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이번 사건으로 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은 커졌다. 훈련받은 군인이 아닌 민간 어선의 침투조차 제대로 식별해내지 못한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더구나 군은 첫 브리핑 당시 국민들에게 사건과 관련된 핵심 내용을 은폐·축소·왜곡했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당시 군은 “북한 어선을 미세하게 포착했지만 파도가 일으키는 반사파로 인식했다”며 “정지된 표적이어서 특정한 표적인지 인지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선박이 해류에 의존해 삼척항까지 떠밀려 왔다는 뉘앙스로 해명한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어선은 엔진을 가동한 채로 삼척항에 입항했다. 거짓 해명 논란이 일자 군은 “어선이 일부 해류를 이용해 흘러내려온 정황이 있다는 점을 말하는 과정이었다”고 부연했다.


의혹은 이뿐만이 아니다. 군은 첫 발표에서 북한 어선이 강원도 삼척항 ‘인근’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삼척항 부두까지 들어와 스스로 정박한 사실은 쏙 빼놓은 것이다. 듣는 사람에 따라에서는 군이 바다에서 어선을 예인했다고 받아들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 군은 “인근이라는 발표는 해경으로부터 보고를 받았으나 조사가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말씀드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김정재 자유한국당 의원이 공개한 해경 상황센터 등의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해경은 신고 접수 후 3시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청와대와 국가정보원, 합동참모본부, 해군작전사령부에 상황을 자세히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어선이 자력으로 입항한 사실 역시 보고서에 포함됐다.


‘파고’ 논란 역시 쉽게 잦아들지 않고 있다. 군이 어선을 포착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로 제시한 파고는 파도의 높이를 뜻하는 단어다. 군은 “파고가 1.5m를 넘은 데 반해 북한 선박은 1.3m 높이로 파고 높이보다 낮았다”며 “근무 요원들은 파도에서 나오는 반사파 때문에 레이더로 식별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상청에 따르면 북한 어선이 정박한 날 파고는 평균 0.2~0.4m 수준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최대 파고 역시 0.4∼0.8m에 그쳤다. 반사파 때문에 식별하지 못했다기에는 그날 바다는 잔잔했다. 군 당국은 다시 “특정 지점에서 측정하는 기상청 파고 측정과 달리 해군은 함정에서 별도로 식별한 작전기상 측정을 적용하는데 지난 9∼15일 동해상 함정의 작전기상 파고는1.5∼2m로 그것을 적용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미 커진 불신은 걷잡을 수없이 퍼져 나가고 있다. 오히려 경계 작전 실패를 무마하기 위해 파고를 부풀린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고 있다.

줄 잇는 비판…정경두 국방부장관 “깊은 사과”

20일 오신환 바른미래당 원내대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국회 차원의 국정조사와 정경두 국방부 장관의 해임건의안 의결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 원내대표는 “코미디 영화에나 나올 법한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다”며 “더 심각한 문제는 군 당국이 경계에 문제가 없었고, 떠내려 온 북한 선박을 어민 신고로 발견해 삼척항으로 예인했다는 거짓브리핑으로 사실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경계에만 구멍이 뚫린 것이 아니라 양심에도 큰 구멍이 뚫린 것”이라며 “거짓브리핑을 반복하며 국민을 속인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중대 범죄행위”라고 강조했다. 오 원내대표는 또 “무장한 북한 군인이 내려왔어도 국민들에게 몰랐다고 말할 것인가”라며 “문재인 대통령은 은폐에 가담한 관련자 전원을 엄중히 처벌하고 경계소홀로 국가 안보에 구멍을 낸 책임자 전원을 문책하기 바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 역시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20일 국회 정책조정회의에서 “해상 경계 작전에 큰 허점을 드러낸 것”이라며 “(어선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삼척항 부두에 정박하기까지 군이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어떠한 변명의 여지도 없다”고 전했다.


논란이 커지자 정경두 국방부 장관은 같은 날 ‘북한 소형목선 상황 관련 대국민사과문’을 통해 “지난 6월 15일에 발생한 북한 소형목선 상황을 군은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를 숙였다. 정 장관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군의 경계 작전 실태를 꼼꼼하게 점검해, 책임져야 할 관련자들에 대해서는 엄중하게 문책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어 “군은 이러한 상황이 재발되지 않도록 경계태세를 보완하고, 기강을 재확립토록 하겠다”며 “사건 발생 이후 제기된 여러 의문에 대해서는 한 점 의혹이 없도록 국민들께 소상하게 설명 드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 장관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국민의 신뢰를 받는 강한 군으로 거듭날 것을 약속드린다”면서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덧붙였다. 사실상 경계 작전 실패를 인정하면서도 은폐·축소·왜곡 의혹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 것이다.

한국당 “국정조사 해야” vs 민주당 “정치공세 그만”

20일 신인균 자주국방네트워크 대표는 이번 사건에 대한 연합뉴스 TV와의 인터뷰에서 “경계 실패는 당연히 책임져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직적인 거짓말, 은폐를 기획하고 지휘하고 승인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과 문책, 처벌”이라고 비판했다. 신 대표는 “해경 등은 국방부의 발표가 거짓이라는 것을 아는 상황인데, 국방부 혼자서 거짓말을 기획했을 것이냐”면서 “우리 탐지 장비가 30년 전 것이라도 그(어선) 정도는 다 잡아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번이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게 순진한 것”이라면서 “혹시 북한의 특수 공작원이었다면 우리는 굉장히 허술한 모습을 노출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전쟁의 영웅 맥아더 장군은 “작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할 수 없다”는 명언을 남겼다. 더욱이 대한민국은 여전히 ‘휴전 국가’다. 휴전 국가에서 경계에 실패한 것은 물론,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축소·왜곡하려 한 행위는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기 힘들다. 이번 어선 귀순 사건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를 명명백백히 밝혀 강하게 처벌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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