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공비의 뜻은 공무를 처리하는데 드는 비용, 또는 그런 명목으로 주는 돈 이라고 돼있다. 이 뜻 대로면 판공비가 계급 높은 사람들에게만 지급될 것이 아니라 공 조직원 모두에게 고루 지급돼야 마땅할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옛 부터 높은 사람들이 비공식적으로 쓸 수 있는 공식으로 인정된 돈이다. 공식으로 보장된 돈이므로 명분만 있으면 규모 안에서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묘미가 크다. 이런 묘미 때문에 우리 옛 고을을 다스리던 수령들 가운데는 녹봉 외로 판공비(?) 뜯어내는 데만 혈안 됐던 못된 벼슬아치가 적지 않았었다. 이때 고을 수령이 판공비로 쓸 수 있는 부적절히 보장된 토지가 은결(隱結)이었다.

은결은 조선시대에 탈세를 목적으로 전세(田稅)의 부과 대상에서 불법 누락 시킨 토지를 말하며, 은복(隱卜), 은전(隱田), 은토(隱土) 라고도 했다. 이를 고을 수령이 찾아내서 나라에 바치는 공식 조세 대장에 올리지 않고 세금 부과를 한 것이다. 고을에 따라서는 본결 필지보다 은결 필지가 더 많은 고을도 많아서 연간 은결이 1천섬을 넘는 고을도 있었다고 한다. 탐관오리들이 서로 탐내 군침을 삼킬 만 했다.

벼슬아치들의 판공비 조달 방식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별별 해괴한 방법을 다 썼다. 적령의 남자들에게 병역을 유예해주고 군포(軍布)를 받는 제도를 악용해서 적령이 되기 전에 사내 아이들을 병역부에 등제시켜 군포세를 물리는가 하면, 죽은 사람을 제적치 않고 세금을 받는 천인공노할 죄악까지 저질렀다.

웃지 못 할 일도 일어났다. 한양 턱 밑의 과천 현감은 한양에 오르는 사람에게 상경세를 받기도 했고, 한강진 별장은 도강하는 사람에게 배 삯 말고 도진세를 받으면서 아이 밴 부인에게는 1.5배를 받아 백성들이 들고일어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조선시대 때부터 관료사회의 판공비 제도는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현대에 와서 최근까지도 판공비 말썽은 끊이지 않는다.

최근 연이어 터진 단위농협 조합장들의 판공비 불법 사용 건은 후안무치의 대표적 사례일 듯하다. 전남 완도 해남등지 단위농협 조합장들이 법인카드로 카드깡을 하거나 노래방을 다니는 등 마구잡이 경비 처리했는가 하면, 법인카드로 농협마트 물품이나 자재를 산 것처럼 꾸며 현금을 되돌려 받은 수법은 조선시대 탐관오리들이 살아 울고 달아날 지경이다. 또 모 부처 장관이 동창회모임 식사비를 판공비로 처리했다가 말썽나자 개인카드로 바꾼 사례는 겨우 드러난 한 단면에 불과 할 것이다. 바로 엊그제 국민을 기막히게 만든 국정감사 피감기관의 국회의원 상대 ‘거액 향응 말썽’ 또한 공무원 판공비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공직사회의 판공비를 ‘눈 먼 돈’으로 보는 시각이 교정되지 않는 한 이런 말썽은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엄연한 국민혈세를 눈 먼 돈처럼 만들고 여기는 이 높은 사람들 판공비 개념만 개혁해도 절세(節稅)효과뿐 아니라 공직사회 분위기 일신에 크게 효험 있으리라고 본다. 이를 위해 국회는 스스로 자숙하는 의미에서도 내년 예산 심의 때 불필요한 판공비를 줄여 서민생활에 직접 기여하는 예산으로 편입토록 노력해야할 것이다.

번지르해 보이는 공약보다 작은 실천하나가 유권자들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첩경 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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