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방 후 반세기 동안이나 대통령의 존칭을 ‘각하’로 불렀고 그 부인을 ‘영부인’으로, 또 그 아들을 ‘영식’, 딸을 ‘영애’로 불렀었다.

이는 과거 군국주의 일본이 2차 대전으로 패망하기까지 천황이 직접 임명한 칙임관과 소장 이상의 장성들에게 붙인 존칭을 그대로 답습시킨 권위주의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의 무소불위 한 권력과 권위에 눌려 누구 한사람 그 부당함을 지적치 못하다가 가까스로 김대중 국민의정부 들어 그 따위 권위주의 잔재를 없애도록 했던 것이다. 그 후 10년 가까이의 세월이 흘렀고 대통령과 그 가족들에 대한 존칭이 일반적으로는 거의 권위의식을 털어 낸 것도 같다. 다만 측근들이 과잉 충성하거나 아첨꾼의 아부하는 말 표현까지를 문제 삼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중국의 고전인 ‘사물기원’에 보면 천자(황제)에게는 폐하의 존칭을, 임금(왕)에게는 전하, 장군에게는 휘하, 높은 벼슬아치에게는 각하, 부모에게는 슬하, 다정한 친지에게는 족하라는 존칭을 쓴다고 돼있다. 또 정승들이 정사를 보는 다락방을 각(閣) 또는 합(閤)이라 해서 자연히 정승들의 존칭이 각하로 쓰였으나, 이미 한나라 때에 지방장관이나 군수의 존칭쯤으로 하락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각하란 표현이 없었으며 시대에 따라 수상 벼슬을 하는 사람에게 ‘합하’로 부른 적 있다. 영부인도 그런 경우이다. 영(令)은 원래 중국에서의 1만호 이상 되는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장관의 벼슬 이름이었다.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때 장관급의 벼슬이었으며, 고려시대 이래로는 정5품 이하 계급으로 밀려났다.

이후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각하’와 ‘영’은 권위계급의 상징이 됐다. 지금 일본의회가 수상을 ‘아무개 군’으로 부르는 사실은 그들 민주화 깊이를 일깨우고 남는다. 이는 미국에서 대통령을 ‘미스터 프레지던트’라고 부르는 수준과 다르지 않다. 미국, 일본 같은 나라에서 정권이 바뀌고 새로 정권을 창출했을 경우 정치 보복을 당하거나 새 측근들이 팔자 고치게 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듯 일본 등 권위주의 본류가 일찌감치 옳은 민주주의를 실천하는데 성공했다. 그런 걸 권위주의 잔류에 해당할 우리만이 대통령을 ‘각하’로 떠받든 권위주의 비수를 떨쳐내지 못하는 바람에 권력중추를 탐한 대통령 병 환자가 독버섯처럼 일어난 것이다. 과거 대통령선거에 세 번씩이나 낙선하고 거듭해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사람이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자 손바닥 뒤집듯 대국민 약속을 깨고 네 번째 대통령선거에 나서 당선한 것이 딱 10년 전 일이다. 그해 대통령선거에 첫 출마한 이회창후보는 망국의 대통령 병(病)을 질타하는 나머지 아이들 교육을 걱정했었다.

그런 그가 똑같이 전철을 밟고 나섰다. ‘각하’의 절대 권력을 맛볼만한 잘 짜인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결의에 차있다. 명분은 역시 나라위한 결단이라고 말했다. 정말 원칙을 내던져야 할 정도로 소중한 결단이었는지, 아니면 진짜 대통령 병 때문이었는지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은 채 청와대 접수를 노려 다듬어진 명분은 어떤 결과에도 결단으로 칭송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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