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삼성가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재계, 언론계, 검찰 등의 커넥션이 담긴 안기부(현 국정원)의 불법도청 테이프가 언론을 통해 일부 공개됐기 때문이다. 21일 밤 방송사 보도 직전 법원이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테이프에 등장한 인사들의 실명은 거론되지 않았지만 가처분 신청을 낸 당사자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주미대사(전 중앙일보 회장)라는 사실에 정·재계 및 언론계는 주목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의 핵심 실세이고 홍 대사는 이건희 회장의 처남이기 때문이다. 안기부 X파일 후폭풍이 삼성가를 강타할 것이란 관측에도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또 왜 이 시점에서 X파일이 공개됐고, 수 많은 불법도청 테이프 중 삼성가 인사들이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내용만 유포되고 있는지 등 X파일을 둘러싼 갖가지 억측도 난무하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삼성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있는 숨은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삼성 죽이기’에 나선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일명‘이상호 기자의 X파일’이 언론에 일부 보도된 이후 정·재계와 언론계는 후폭풍을 경계하며 대응책 및 후속 보도 수위를 놓고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특히 언론에 실명으로 거론된 삼성그룹은 MBC와 KBS가 21일 9시 뉴스를 통해 테이프 내용 일부를 보도하자 곧바로 심야회의를 열어 대응책을 논의하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삼성은 방송 신문 인터넷 등 모든 매체를 상대로 보도 내용 수위에 따라 법적 대응을 검토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삼성 숨은 배후세력 존재

이처럼 삼성이 대 언론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전면전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X파일의 유출경위 및 보도 배경 등에 삼성을 견제하고자 하는 숨은 배후 세력이 존재할 것이란 추론 때문이다. 이와관련 삼성의 한 관계자는 “언론에 공개된 녹취록과 도청 테이프 내용이 우리가 파악한 것과는 다른 것 같다”며 “X파일 유출 과정과 언론 보도 이면에는 삼성을 음해하는 세력들의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을 것이란 의혹을 떨칠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정·재계와 언론계 주변에서도 X파일 공개 배경과 관련한 갖가지 해석과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과거 대선이나 총선 등 크고작은 선거 시즌때면 재벌그룹들이 정치권과 특정 후보에게 적지 않은 후원금을 제공했던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정치권과 재계의 유착관계는 선거 후원금이 좌우한다는 얘기가 나돌 정도였다.

또 문제가 되고 있는 97년 대선 때 삼성뿐만 아니라 수많은 재벌기업들이 여야 대선후보측에 정치자금을 후원했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치권과 재계가 선거를 매개로 유착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 이런 정황에 비춰볼 때 왜 하필 이 시점에서 X파일이 공개됐는지, 또 과거 안기부가 불법 도청한 테이프가 수천개가 넘는데 왜 삼성가 인사들이 등장하는 내용만 유출됐는지 등 의혹은 더욱 부풀려지고 있는 형국이다.재계 관계자들은 삼성가를 시기하고 독주를 견제하는 각계 숨은 세력들이 이번 파문에 직간접적으로 개입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삼성공화국’으로 통할 만큼 현 정부 출범이후 각 분야에서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삼성인 만큼 그 저항세력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란 시각이다.

보수기득권층 삼성가 견제

그렇다면 삼성가를 견제하는 숨은 세력은 누구일까. 정치권 관계자들은 보수·기득권층을 우선 꼽는다. 참여정부 출범이후 삼성맨들 다수가 정부 요직에 발탁되는 등 개혁성향인 현 정부와 삼성이 밀월관계를 유지하자 보수기득권층이 삼성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특히 삼성가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중앙일보와 첨예하게 맞서고 있는 조선일보는 이번 파문을 확산시키는 산파역을 톡톡히 했다. 당초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를 처음 입수한 매체는 MBC였다. 지난 1월 이상호 기자가 테이프를 입수했지만 MBC는 내부 격론이 오가면서 방송유보 결정을 내렸다.

수개월 동안 X파일의 존재 및 내용에 대한 궁금증과 의혹만 증폭시켰을 뿐이다.이런 와중에 조선일보는 발빠르게 안기부의 비밀도청팀으로 알려진 ‘미림’의 실체를 보도하는 등 X파일 파문에 불을 지폈다. 조선일보 보도 이후 MBC와 KBS는 뒤늦게 보도 결정을 내리고 같은날 9시 뉴스에 X파일과 관련한 내용을 일부 공개하기에 이르렀다.노동계와 이들을 대변하는 민노당도 삼성에는 만만찮은 저항세력이다. 국내 최대 재벌그룹인 삼성이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만큼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공공의 적인 셈이다.X파일 일부 내용이 공개되자 민노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삼성 공격을 주도하고 있다. 정치자금에 자유롭지 못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이번 파문의 초점을 과거 안기부의 불법도청에 맞추고 있는 반면 민노당은 삼성 이건희 회장을 직접 겨냥하고 있다.

민노당 김성희 부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이건희 회장이 직접 과거의 모든 검은 거래 실체를 국민 앞에 직접 밝히고 죄를 청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삼성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대사가 방송금지가처분 신청을 낸 것과 관련해서는 “삼성판 분서갱유”라고 일축했다.민노당은 특히 국민의 알권리를 존중하고 과거 잘못된 정경유착 관행을 타파하기 위해서라도 국회 차원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공정위법 헌소 여권 심기 불편

시민사회단체들도 삼성과 이건희 회장 압박에 나서고 있다. 민주언론운동연합은 “이건희 회장과 언론사주인 당시 홍석현 사장이 불법정치자금 제공에 직접 개입됐는지 여부를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전국언론노동조합은 “법적 처벌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MBC는 녹음 원본을 방송해야 한다”는 입장이다.이밖에 민변과 참여연대 등도 이번 사안과 관련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동시에 범법사실이 밝혀질 경우 엄정처벌을 요구하고 있다.이처럼 각계 비토세력으로부터 전방위 압박을 받고 있는 삼성에 우군으로 믿었던 정부와 여권도 등을 돌리고 있는 분위기다. 집권초부터 유지해 온 참여정부와 삼성의 밀월관계에 갈등 기류가 형성된 것은 삼성의 헌법소원 제기가 빌미가 됐다. 삼성은 지난달 28일 공정거래법상 재벌 금융계열사 의결권 축소 문제와 관련해 헌소를 제기했다.

삼성의 헌소 제기 이후 정부와 열린우리당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여권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 출범이후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삼성의 기업활동에 정부가 적극 협조하고 있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라며 “헌소 제기 이후 정부 및 여권 관계자들이 삼성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가지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보수·기득권세력과 조선일보, 노동계, 시민사회단체 등으로부터 심한 견제를 받고 있는 삼성이 설상가상으로 여권과의 밀월관계에도 금이 가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이번 X파일 공개 파문에 삼성 견제 세력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된 바 없다. 다만 삼성 독주를 견제하는 제 세력들이 적지않게 존재하고 있고, 이번 파문의 불똥이 삼성가를 겨냥하고 있는 만큼 삼성의 시련기는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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