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역 후 ‘말고기’로 비참한 최후 맞는 경주마들

[사진=페타]
[사진=페타]

 

      
[일요서울 | 황기현 기자] 경주마는 사람의 즐거움을 위해 평생 좁은 트랙 위를 달린다. 제대로 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정해진 훈련을 반복하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자신의 삶 전부를 바치는 것이다. 이처럼 평생을 달린 경주마들은 은퇴 이후에도 평온한 삶을 살지 못한다. 특히 일부 경주마는 경쟁력이 떨어지면 도축돼 ‘말고기’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충격적인 사실에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경주마에 대해 관리 책임이 있는 한국 마사회는 이 같은 행태를 방관하고 있다.

도축 과정에서 학대 등 정황 발견돼 논란
연간 퇴역하는 경주마 1400~1600마리

앞서 지난 5월 국제동물보호단체 페타(동물을 윤리적으로 대하려는 사람들·PETA)는 한국에 수출된 경주마들의 최후가 담긴 ‘케이팝? 케이 고통! 한국 최대 말 도축장 안에서’라는 영상을 공개했다. 3분 분량의 영상에는 순종 경주마로 활약하던 말들이 트럭에 실려 오는 모습이 담겨 있다. 작업자는 말들을 폭행하며 강제로 도살장 안으로 끌고 가 도축한다.


이 끔찍한 영상은 페타 조사관이 지난해 4월부터 올해 2월까지 10개월 동안 위장 잠입해 9차례에 걸쳐 촬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축은 제주시 애월읍에 위치한 축협축산물공판장에서 이뤄졌다. 2살에서 6살 사이의 경주마 22마리가 이곳에서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경주마의 후손이 ‘450g에 2만 원’

지난해 도축된 경주마 ‘승자 예찬’은 2012년생이다. 승자 예찬의 아버지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국 씨수말 ‘메디글리아 드 오로’다. 각종 대회를 휩쓸며 경매에서 9520만 달러(약 1100억 원)에 낙찰된 명마 ‘송버드’는 승자예찬과 형제 사이다. 승자 예찬 역시 그 값을 쉬이 매길 수 없는 말인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고급 혈통으로 대우받던 승자 예찬 역시 최후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페타에 따르면 승자 예찬은 2018년 5월 8일 도축돼 1파운드(약 453g)당 17달러(약 1만 9900원)라는 헐값에 팔려나갔다.


도축 과정은 잔혹하다. 일부 작업자들은 앞날을 예감하고 트럭에서 내리기를 거부하는 말의 얼굴을 반복적으로 폭행한다. 또 몽둥이로 배를 찔러 강제로 도축장에 밀어 넣기도 한다. 경주를 마치자마자 도축장으로 끌려온 말도 있었다. ‘케이프 매직’이라는 말은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실려 왔다. 붕대는 경기용 보호 장비로, 녀석은 마지막 경기가 끝난 지 채 72시간도 되지 않아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친구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말도 있다. ‘로열 리버’라는 말은 머리에 전기 충격기를 맞은 뒤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사체를 옮기는 호이스트에 매달린 로열 리버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로열 리버의 뒤에서는 같은 농장에서 자란 말이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녀석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 장면도 영상에 담겨 있다.


상식적, 윤리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이러한 행위는 분명한 학대다. 그러나 현행법으로는 작업자를 처벌하기가 애매한 상황이다. 동물보호법에는 동물에게 ‘신체적 고통’을 입히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신체적 고통’에 대한 정의는 없다. 페타와 생명체학대방지포럼이 제주축협을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고소했음에도 뚜렷한 처벌 결과가 나오지 않은 이유다. 이에 대해 김동현 농림축산식품부 동물복지정책팀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신체적 고통에 대해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건 사실”이라며 “동물 학대 규정 방식이 한정적이라서 각각의 행위에 해당하는지가 학대행위로서 (결정적이다)”라고 설명했다.

“경주마 도축에 마사회 책임 있어”

법적 규제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학대·도축 행위가 이어지자 경주마 관리에 대한 책임 의무가 있는 한국 마사회에 대한 비판이 커지고 있다. 박창길 생명체학대방지포럼 대표(성공회대 경영학과 교수)는 일요서울에 “마사회가 물리적으로 도축하는 것에는 관여하고 있지 않다”면서도 “퇴출당한 경주마들이 도축을 당하고 말고기로 사용되는 것에 마사회의 책임이 있다고 보고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비판했다. 경마산업의 시스템과 정책을 만드는 주체인 마사회가 퇴역 경주마를 도축하는 데 문제가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마사회는 퇴역 경주마가 도축당하는 것에 대해 일부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에 따르면 국내에서 한 해 은퇴하는 경주마는 1600여 마리에 달한다. 그러나 재활하는 말의 비율은 3%에 불과하다고 박 대표는 주장했다. 적지 않은 경주마가 도축돼 말고기로 팔려 나가는 것이다. 박 대표는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의 말고기가 이런 경주마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토로했다.

“말고기는 전통적으로 음식이 아니었다”

박 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이나 프랑스와는 다르게 말고기를 음식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이는 말을 인간과 교감하는 동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승마 관련 인사에게 말고기를 권하는 행동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동물보호법에서도 인간을 위해서 사역한 동물들은 식용으로 쓰지 않는 것이 점차 제도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농림축산부는 지난 1월 축산물 등급판정 세부기준 개정안에 말고기 등급제 시행을 포함시켰다. 말고기를 등급화해 말고기산업을 육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박 대표는 “경주마가 식용으로 적합한지 의문”이라며 “경주에 이기기 위해 많은 약물을 투입한 경주마를 먹는 것이 과연 (소비자 건강에) 괜찮은지 이번 기회에 살펴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사회 “경마 선진국도 도축” 항변

이러한 논란에 대해 한국 마사회는 여러 부분이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마사회에 따르면 퇴역하는 경주마는 연 1400여 마리 수준으로, 이 중 850마리 정도가 승용이나 번식용으로 재활용된다. 1600마리가 은퇴하고 3%만 재활한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사회는 또 경마 선진국의 경우도 말을 식용이나 사료, 화장품 재료 등으로 사용 중이라고 항변했다. 여기에 퇴역 경주마의 소유자가 마주기 때문에 마사회가 관여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현역으로 활동할 당시에는 마사회가 개입할 수 있지만 퇴역한 경주마에 대한 개인의 재산권 행사를 막을 방법은 없다는 설명이다. 다만 마사회 측은 “민간과의 협업으로 퇴역 경주마에 대한 순치·조련 시행 후 승용마로 전환해 경주마의 임의 처분(불법 도살 등) 사례를 최소화하겠다”며 “중장기적으로는 마주와 협의해 퇴역 후 활용방안 마련을 위한 복지증진 대책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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