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년 만에 국내 송환된 한보그룹 4남 정한근씨
21년 만에 국내 송환된 한보그룹 4남 정한근씨
  • 신유진 기자
  • 입력 2019-06-28 20:59
  • 승인 2019.06.28 21:34
  • 호수 1313
  • 37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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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여세·횡령 등 체납액 무려 3000억여 원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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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서울 ㅣ신유진 기자] 정한근 전 한보그룹 부회장이 해외 도피 21년 만인 지난달 2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송환됐다.

정 씨는 1997년 11월 한보그룹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EAGC) 자금 약 322억 원을 스위스 비밀 계좌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다. 정 씨는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이다.

정씨의 송환으로 한보그룹이 재주목 받고 있으며 그의 도피 과정에 대한 수사도 이어질 전망이다. 국세청은 이들이 횡령한 돈과 관련해 추징한다는 방침이지만 세월이 많이 지나 쉽지는 않아 보인다. 숨어 지냈던 정 씨의 21년간 도피 과정을 추적해본다.

역술인 조언으로 은마상가에서 시작한 ‘한보’, 한순간 나락으로
국세청 "국내 재산 환수 노력 중"..."상속 입증돼야 추징 가능" 시각도

21년간 사라졌던 정 씨의 흔적이 발견된 건 지난해 8월께다. 그의 가족들이 캐나다 밴쿠버에 있는 사실을 검찰이 파악하면서 은밀한 추적이 시작됐다. 정 씨가 캐나다에서 일정 기간 거주하기 위해선 신원보증을 해 줄 스폰서가 필요한데, 가족의 서류에는 ‘스폰서’ 류 모씨가 적혀 있었다.

검찰 추적 결과 류 씨는 정 씨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현재 류 씨는 국내에 거주하고 있으며 캐나다에 입국한 기록조차 없었다.

캐나다 당국에 제출 된 서류 사진엔 류 씨의 얼굴이 달랐고 이름도 2010년 개명했다. 검찰 조사 결과 류 씨의 지문과 정 씨의 지문은 동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씨는 동창인 류 씨의 신분으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미국과 캐나다 영주권 및 시민권을 취득했고 다니엘, 션 헨리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2017년 7월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에콰도르에 입국한 사실을 확인한 검찰은 에콰도르 대법원에 정씨에 대한 범죄인 인도 청구를 신청했지만 에콰도르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

대신 에콰도르 측에서 정씨가 체류비자 기간이 만료돼 파나마를 경유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1시간 전 한국 정부에 정 씨의 출국 사실을 알렸다. 이에 검찰은 정씨를 파나마, 브라질 상파울루, 아랍에미리트연합과 두바이를 거쳐 한국으로 21년 만에 압송했다. 

정씨일가 체납액 상상초월… 가장 높다

정 씨의 국내 송환 소식과 함께 수천억 원에 달하는 정씨 일가의 국세 체납액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정 씨의 아버지 정태수 전 회장은 1992년부터 증여세 등 2225억 원이 넘는 세금을 체납했다.

지난해 국세청이 발표한 고액상습 체납액 가운데 가장 높은 액수다. 여기에 640억 원에 달하는 정 전 회장의 셋째 아들 정보근 전 한보철강 대표이사와 넷째 아들 정 씨의 체납액 253억 원을 합하면 정씨 일가의 체납액만 3000억 원이 넘는다.

검찰 발표에 따르면 정 씨는 조사 과정에서 정 전 회장이 지난해 남미 에콰도르에서 대장암으로 사망했으며, 자신이 직접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까지 했다고 진술했다. 정 씨의 진술대로 정 전 회장이 사망했을 경우 넷째 아들인 정 씨를 비롯해 상속자들은 체납된 납세 의무도 상속한다.

현행 국세기본법 제24조에선 상속에 따른 납세 의무 또한 지도록 규정하고 있다. 단, '상속으로 받은 재산의 한도'에서다. 즉, 상속 재산이 없거나 상속인이 상속을 포기할 경우 납세 의무를 승계하지 않는다.

일각에선 정 전 회장의 자식들이 상속을 포기하면 체납된 세금을 아예 회수하지 못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하지만 상속을 포기한다고 해서 아예 체납액을 징수할 방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은닉재산을 찾아낼 경우 상속인들의 상속포기와는 관계없이 체납액을 징수할 수 있다. 김현준 신임 국세청장은 후보자 신분이던 지난달 26일 천문학적 규모의 세금을 체납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 일가에 대해 "은닉 재산을 찾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국세청장은 이날 오전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정 전 회장을 비롯해 4남 정한근 전 부회장 등의 체납액을 받아낼 수 있느냐는 유승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이 같이 답했다. 이어 "은닉 재산을 계속 추적하고 있지만, 그분들이 해외에 주로 있었다"며 "국내 재산에 대해서는 철저히 환수하려고 노력 중"이라고 강조했다.

로비로 시작해 로비로 끝난 한보그룹

한편 한보그룹은 1974년 정태수 전 회장이 한보상사를 설립하며 시작됐다. 세무공무원 출신인 정 회장은 역술인으로부터 “사업을 하라”는 조언을 듣고 사업을 시작했다. 강원도의 몰리브덴광산을 사들여 이를 수출하는 일을 시작했으며 이후 주택, 종합건설, 탄광 상가, 목재 상사 등 계열기업으로 뻗어나갔다. 한보그룹은 이 여세를 몰아 84년 금호철강을 인수해 한보철강을 설립하게 된다. 이 계기로 한보그룹은 재계 랭킹 30위권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승승장구만 할 거 같았던 한보그룹은 1991년 ‘수서지구 택지 특혜분양사건’으로 정 회장이 구속되면서 사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계열사 처분과 함께 합병으로 돈을 마련했고 이 돈으로 강남구 수서와 대치 지역 개발제한구역 땅을 사들여 로비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정치권에 있던 많은 공직자들이 수사와 함께 구속됐다.

정 회장 역시 뇌물죄로 구속됐다. 하지만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정 전 회장은 한보철강을 통해 은행으로부터 추가금융지원을 받았다. 재기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 행동은 훗날 ‘한보사태’와 함께 대한민국이 IMF 외환위기로 가는 계기가 됐다.

한보그룹은 제철소 건설비용을 위해 총 5조 7000억 원의 대출을 받았고 이후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부도를 맞았다. 정부와 금융기관의 검열 없는 막대한 대출은 한보그룹을 부도의 길로 이끌었다.

당시 업계 관계자들은 한보그룹은 엄청난 대출로 세워진 모래성 기업에 불과해 쓰러지는 건 시간문제였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보그룹 부도를 시작으로 97년 4월 삼미그룹, 진로그룹이 부도유예에 들어갔고 5월에 대동주택, 7월에는 기아그룹 등 연쇄부도가 발생했다.

검찰은 한보의 특혜대출 사건에 국회의원, 은행장, 장관 등 고위 공직자들이 연루된 걸 알면서도 적극적인 수사를 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 중심에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가 연루됐기 때문이다. 당시 홍인길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수사를 받던 중 “나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깃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이후 정 전 회장은 또 다른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2002년 10월 협심증 진단을 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러나 2005년 자신의 셋째 며느리가 이사장으로 있는 강릉영동대학 교비 수십억 원을 횡령해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2심 재판 도중 2007년 대장암 재발 우려를 거론하며 “치료차 일본에 가야한다”고 출국금지 집행정지를 받아 해외로 나갔다가 자취를 감췄다. 

 

신유진 기자 yjshin@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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