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불 망(三不忘) - [61]
삼 불 망(三不忘) - [61]
  •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 입력 2019-07-01 14:31
  • 승인 2019.07.01 14:37
  • 호수 1313
  • 58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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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조일신의 난은 6일 만에 평정되고 조일신의 한 달 천하는 막을 내렸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도성의 온 백성들은 만세를 불렀다. 하늘도 이에 화답했다. 연일 흙이 비 오듯 내리는 토우(土雨)가 자욱하게 끼었으나 조일신을 베고 나니 하늘이 맑게 개었다.  

두 번째 우정승으로 조정에 복귀하다

그해(1352년) 10월 7일. 
공민왕은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후 마침내 왕권을 회복했다. 그리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였다. 공민왕은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曺益淸)을 좌정승, 유탁(柳濯)을 판삼사사, 홍언박(洪彦博)을 찬성사, 이공수를 삼사우사, 김용을 밀직부사, 안보(安輔)를 밀직제학, 최영을 호군(護軍 : 장군, 정4품)에 임명하였다. 
두 번째 우정승에 제수된 이제현은 부임 인사차 태후전을 찾았다.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 홍씨는 활짝 웃는 얼굴로 이제현을 맞이했다. 
“시중, 다시 조정에 출사한 것을 경하드립니다.”
“늙은 신하에게는 지나친 광영이옵니다. 모두가 태후마마의 은덕인 줄로 아옵니다.”
“당치 않아요. 이 나라 종사에 끼친 시중의 공헌은 만세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시중의 인망이지요. 그리고 조정의 홍복이구요.”
“과찬의 분부시옵니다. 정승의 자리에 두 번 오르는 것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서 오늘 전하의 하명을 받고 물러날 뜻을 아뢰었습니다만 염치없이 다시 중임을 맡게 되었사옵니다.”
“잘 하시었어요. 주상이 시중의 뜻을 왜 모르겠어요. 지금 이 나라엔 시중의 높은 경륜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조일신의 난 이후 조정이 뒤숭숭합니다. 이것을 마무리 하는 것도 다 시중의 몫이지요.”
“망극하옵니다.”
이제현은 태후의 마음씀이 고맙기만 하였다. 왕실의 어른으로서 자신에게 믿음을 주는 우의가 너무나 절절했기 때문이다. 명덕태후 홍씨는 이제현에 대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22년 전 남편인 충숙왕이 정치에 염증을 느껴 세자(충혜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는데, 이때 충숙왕은 간신들의 말을 곧이듣고 홍씨를 고향으로 추방하고, 충혜왕과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한 일이 있었다. 이때 충혜왕의 폐정을 간하고 사직해 있던 이제현은 은둔생활을 하는 홍씨를 위로하는 서한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홍씨는 이를 두고두고 고마워한 것이다.
이제현은 명덕태후의 배려를 가슴속에 따뜻이 간직하면서 태후전을 물러나왔다. 그리고 공민왕의 부름을 받고 다시 편전으로 향했다. 편전에는 보우(普愚) 스님이 미리 와 있었다.
공민왕이 보우 스님에게 나라 다스리는 일을 묻자, 보우는 이렇게 대답했다.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요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시옵소서. 거기에는 때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지 않고는 안 되옵니다.”
이어 공민왕이 이제현에게 조일신의 난 이후 조정의 수습방안을 묻자, 이제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조일신은 언젠가는 곪아터지고 말 몸속의 종기와 같았사옵니다. 그 때문에 왕도가 훼손당했으며, 나라의 발전이 정체된 것이옵니다. 전하께서는 과감히 조정의 독근(毒根)을 뿌리째 뽑았사옵니다. 이제는 대지(大志)를 펴서 고려의 자력갱생과 부국강병을 위해 소신껏 정사를 펴 나가셔야 하옵니다.”
공민왕은 마음의 평안을 얻은 듯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조일신의 난을 수습하고 민생을 바로 세우는 전권을 시중에게 드릴 테니, 시중의 뜻대로 정무를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이제현은 무엇보다 먼저 교서(敎書)를 내려 민심의 동요를 막았다. 그리고 임금과 부모에 대한 죄와 강도 및 살인 등의 고의범을 제외한 가벼운 죄인을 사면하여 분열된 백성의 힘을 하나로 모았다. 이후 국고를 재정비하고 조정의 분위기를 일신했다. 이처럼 밤낮 없이 조일신의 난의 뒷수습을 하여 3개월이 경과하자 어느 정도 뒷처리가 마무리 되었다. 
1353년(공민왕2) 새해가 밝아 왔다. 
정월 초에 공민왕은 기철의 어머니인 영안왕(榮安王) 대부인 이씨를 신년 인사차 찾아갔다. 이후에도 공민왕은 여러 차례 대부인을 위한 연회를 그녀의 집에서 벌이기도 했다. 공민왕의 이 같은 노력은 마음에도 없는 고육지계(苦肉之計)였다. 기철과 그 세력을 안심시켜 시간을 벌어 힘을 키우기 위한 원모심려였던 것이다.
이제현은 기철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공민왕의 처지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해 보았다. ‘나라이되 나라가 아닌 고려(國之不國 국지불국)의 왕이되 왕이 아닌 인물’이 바로 공민왕이었다. 이제현은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는 옛 속담을 상기하며, 신년을 맞이하는 정국 구상을 골똘히 했다. 
조일신 도당이 일망타진되었다손 치더라도 공민왕은 상당한 정치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아직 조정에 안정적인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강력한 개혁정책을 펼친다는 것은 정치적 모험이다. 따라서 정치적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혁을 중단할 수밖에 없고, 상당한 기간 기철을 위시한 부원배 세력과의 공존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정국이 전개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 개혁의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을 때까지 잠시 물러나 있자. ‘공을 세우고 몸을 낮추는 것이 하늘의 이치’(功遂身退 天之道 也 공수신퇴 천지도야)라는 노자의 말이 있지 않던가.

다시 사직하고 지공거가 되다

이제현은 우정승의 자리를 던져 큰 마음의 평안을 얻기로 결심하고 다시 사직을 청원했다.
“전하, 소신은 조일신의 난의 뒷수습을 대과(大過) 없이 수행했사옵니다. 이만 사직을 청하옵니다.”
“시중, 이제 겨우 정국이 안정되었는데 사직이라니요?”
“신이 지난 십수 년 동안 초야에 머물면서 깨달은 바는 매사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은 금물이라는 것이옵니다.” 
“우정승에 제수된 지 불과 석 달밖에 안 되는데 벌써 물러날 생각을 하신단 말입니까?”
“조일신의 난의 뒷수습을 한 것으로 소신의 소임은 끝났다고 생각하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조정은 시중의 경륜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는 우정승의 소임을 다할 인재들이 많사옵니다.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옳을 것으로 아옵니다.”
“시중의 뜻은 이해할 수 있으나, 어쨌든 시중의 사직을 가납할 수 없습니다.”
“전하, 이 늙은 신하의 소원이옵니다. 가납해 주시옵소서.”
사직을 하겠다는 이제현의 의지가 너무나 강력하자 공민왕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중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사직을 가납할 수밖에 없으나,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무엇이옵니까?”
“과인이 시중을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다시 조정에 출사할 것을 약조해야 합니다.”   
“소신의 이 한 목숨은 이미 사직을 위해 바친 목숨이옵니다. 신명을 받들어 전하의 뜻을 받들겠사옵니다.”
그해 정월 병자일. 이제현은 김해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다시 우정승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 자리를 홍빈(洪彬)이 승계했다. 조익청이 좌정승, 홍언박·류탁·이공수가 찬성사, 이달충이 감찰대부에 임명되었다. 
다시 봄이 돌아왔다. 공민왕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이 절실했다. 이에 과거를 치룰 결심을 했다. 과거시험을 총괄할 지공거의 적임자는 시중에서 물러나 있는 조정의 신망 받는 원훈(元勳) 이제현이었다. 
공민왕은 다시 이제현을 편전으로 불렀다.
“시중, 대감께서는 33년 전 충숙왕 때 지공거를 맡아 본 경험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러하옵니다.”
“그 때의 경험을 되살려 이번에 다시 한 번 지공거를 맡아 주셔야 하겠습니다.”
“예, 전하의 분부 받잡도록 하겠사옵니다.”
“과인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시지요?”
“그러하옵니다. ‘눈이 내려야 비로소 송백의 진가를 알 수 있다(雪後始知松柏操 설후시지송백조)’ 는 말이 있사옵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국에는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인재들이 필요하옵니다.”
“과인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소신, 미력하지만 조정에 청신한 기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인재들을 등용하는 데 신명을 바치겠사옵니다.”
“동지공거로는 누굴 쓰면 좋겠습니까.”
“학문과 덕망이 높은 찬성사 홍언박(洪彦博)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1353년(공민왕2) 5월. 
이제현은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 향시(鄕試)를 주관했다. 조정에 기반이 열악한 공민왕이 강력한 개혁정치를 펼칠 수 있도록 인재들을 선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려는 시험의 나라였다. 가문이 한미한 집안의 자제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 하나뿐이었다. 그길만이 환경의 차이, 출발점의 차이를 극복하고 신분상승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들 과거에 매달리고 과거에 운명을 걸었다.  
이제현은 크게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집안에서 큰 인물이 나온다는 ‘미유와구 이산신교(未有窪溝 而産神蛟)’라는 말을 신봉하고 있었다. 아울러 그는 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할 줄 아는 용인(用人) 철학과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정의로운 사회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돈 없고 힘 없는’ 민초들에게 구원의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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