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차기주자 대열에서 다소 이탈된 느낌을 주던 김근태 복지부 장관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청와대발 연정-개헌론으로 차기 대권주자들의 움직임이 서서히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으나, 김 장관은 그동안 물밑 행보만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로선 더 이상 몸을 낮추고 있을 처지가 아니라는 판단이다. 특히 여권내 강력한 경쟁자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김정일 면담 등으로 입지굳히기에 나서면서 김 장관의 마음은 더욱 바빠졌다. 이런 와중에 김 장관의 사조직이라 할 수 있는 ‘국민정치연구회(이하 국정연)’ 소속 의원들이 최근 제주도에서 극비 회동을 가져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이제 움직일 때다”

제주도에 모였던 김근태계 국정연 소속 의원은 장영달 최규성 이호웅 문학진 강창일 이인영 한병도 유선호 유승희 이기우 노영민 김태홍 의원 등. 이들은 지난 달 23~25일 2박3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다녀왔다. 이들은 ‘단순한 하계 세미나’라는 입장이지만 정가에서는 이들의 비밀 회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국정연은 과거 민주당 내 재야성향 인사들의 모임으로 지난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선 노무현 후보와 김근태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이냐를 두고 난상 토론을 벌이다 결국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노 대통령의 당선 이후 국정연은 김 장관을 주축으로 한 모임으로 빠르게 변모해왔다. 김 장관의 입각 이후부터는 당내 차기 주자들과 물밑 대리전을 전개하고 있다.

청와대 향한 불만 토로

국정연은 앞으로 치러질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 장관을 지지하는 핵심역할을 맡게 될 전망이다. 정치권에선 10월 재보선 이후와 내년 지방선거 사이 이들이 당내 노선 투쟁에 다시 불을 붙일 것이라는 관측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정연 인사들의 제주도 회동과 관련,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문학진 의원은 “(연정 및 개헌과 관련) 뭘 알아야 토론을 하지 않겠느냐. 연정이든, 개헌이든 언제 당에 상의한 적이 있느냐. ‘정보’ 자체가 없다”며 최근 불거진 연정-개헌론과 관련해 청와대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다. 이인영 의원은 “김 장관의 측근으로 알려진 의원들이 회동해 연정과 관련 얘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 다들 부담스러워 했다”면서 “국정연 체제 정비 등에 관한 이야기만 나눴다”고 회동과 관련해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회동에 참석한 다른 의원들 역시 한결같이 조심스러운 입장을 보였다. 자칫 내용이 흘러나가거나 확대해석이 나올 경우 김 장관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연정-개헌론과 관련, 이들이 청와대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대목에서 제주도 회동 당시 오간 밀담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이인영 의원은 일찌감치 조기 개헌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내각제로의 개헌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연정 논의를 바라보며 뭔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이다. 내각제는 대통령직선제라는 민주화 투쟁의 성과를 부정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발언을 감안할 때 세미나에 참석한 의원들이 연정-개헌론에 대한 김 장관측의 대응논리가 어느 정도 완성단계에 이른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범개혁세력 헤쳐 모여

열린우리당 일각에선 향후 연정-개헌론을 둘러싼 계파별 입장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국정연을 중심으로 한 친김근태계는 노 대통령의 연정 구상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표시해왔다. 따라서 이번 제주 회동을 계기로 김근태계는 ‘내각제 개헌 반대’ 입장을 보다 분명히 할 것이라는 관측이다.김근태계 의원들이 최근 당내 계파의 축을 이루고 있는 신기남 유시민 의원 등과 ‘신진보연대모임’을 공식 출범키로 한 것 역시 이러한 움직임과 맥이 닿아 있다는 분석이다. 10월 재보선 이전에 연정-개헌론에 대한 입장을 확실하게 정리한 뒤 선명성을 부각하며 국면전환을 노린다는 계산인 것. 김근태계의 이같은 움직임은 최근 우리당내 대권주자간 세력판도에서 김 장관이 크게 뒤처진 느낌을 주는 것과 무관치 않다.

경쟁자인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입각 후 남북관계발전기본법 제정과 남북교류협력지원금 대폭 인상을 국회에 요구하는 등 북한문제를 들고나오면서 인지도가 크게 오르고 있다. 김 장관의 한 측근의원은 최근 “김 장관이 대권 주자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일요일마다 그가 홈페이지에 올리는 ‘일요일에 쓰는 편지’ 때문일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지난 해 7월 초 동반 입각한 정 장관이 취임 1주년을 맞아 ‘6자회담’을 성과물로 내놓은 것에 반해 김 장관은 “살아 돌아가지 않을 각오로 강을 건넌 뒤 밥해먹을 솥과 돌아갈 배를 부쉈다는 파부침주(破釜沈舟)의 각오로 보건복지부에 왔다”는 소감을 밝혔을 뿐이다. 고문 후유증 때문에 유난히 에어컨 바람을 싫어해 힘든 여름을 보내는 김 장관이 향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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