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파일이 DJ를 향하고 있다.’ 전·현직 대통령인 DJ와 노무현 대통령. 이들 두 사람이 ‘안기부 X파일’이라는 폭탄을 들고 벼랑끝 승부에 나섰다. 특히 이 두 사람의 전쟁은 노 대통령이 정치적 승부를 건 ‘연정’ 문제와 이해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현 상황에서 칼자루를 쥔 쪽은 노 대통령. ‘살아있는 권력’인 그는 이미 정계은퇴 상태인 DJ보다는 훨씬 유리한 입장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노 대통령은 검찰이 압수한 안기부(현 국정원)의 불법 도청 자료를 공개하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다. 이는 다분히 DJ를 겨냥한 것이다. 안기부의 주요 도청 대상이 DJ와 그 주변인물로 알려진 상황에서 자료 공개는 DJ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안기부의 불법 도청 사실이 드러나면서 하드웨어(도청 행위)로 YS에게는 치명타를 입힌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소프트웨어(도청 내용)로 DJ마저 무릎꿇게 한다면 정치적 실익은 매우 크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여권 내 차기 대권경쟁이 호남 대 영남 대결구도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해 노 대통령이 DJ와의 관계 청산을 시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참여정부 출범 이후 노 대통령과 DJ의 관계는 한마디로 ‘애증’으로 표현할 수 있다. 대북송금 특검과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분당 과정에서 두 사람은 적지 않은 앙금의 벽을 쌓았다. 반면 대북문제 해법과 호남민심을 얻기 위해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인사들은 DJ에 대한 구애작전을 끊임없이 전개했다. 참여정부를 권력 승계로 받아들이고 있는 DJ 입장에서는 권력의 비정함을 다시 한번 절감해야 했고, 노 대통령은 호남권에서 여전히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DJ를 어떻게든 활용하고자 하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던 것.이처럼 애증관계를 쌓아온 두 사람이 최근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한 ‘안기부 X파일’과 연정론, 그리고 차기 대권구상에 대한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냉기류를 넘어 사생결단의 벼랑끝 승부쪽으로 가고 있는 분위기다. 여기에 국정원이 5일 DJ정부 시절에도 도·감청이 이루어졌다고 시인하면서 그야말로 양측의 각은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졌다.

테이프 공개 청와대 배후설

특히 ‘안기부 X파일’과 관련한 양측의 앙금의 골은 갈수록 깊어지는 형국이다. 검찰은 전 안기부 미림팀장인 공운영씨 자택에서 압수한 불법 도청테이프에 대해 ‘수사 및 공개 불가’ 입장을 밝혔지만 정치권은 공개 입장을 강력히 고수하고 있다. 여야 모두 수단과 방법상(특별법과 특검)의 차이는 있지만 공개해야 한다는 입장에는 공감하고 있다. 여기에 청와대도 공개 입장을 분명히 해 그 배경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청와대의 테이프 공개원칙 천명은 노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정치권은 해석하고 있다.야권에서는 노 대통령이 검찰의 도청 테이프 1차 분석 내용을 보고 받고 정면돌파를 지시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불법도청을 자행한 것은 YS정권이고, 도청 대상자는 주로 DJ와 그 주변인물로 알려졌기 때문에 테이프 내용이 공개되더라도 현 정권은 손해 볼 게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야권은 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국정원은 DJ정권 시절에도 4년여 동안 조직적으로 도·감청이 이뤄졌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중간 조사결과를 발표해 ‘안기부 X파일’ 유탄은 DJ와 그 측근들에게 번지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검찰은 국정원 발표 직후 수사 범위를 국정원 도청 전반으로 확대키로 했다. DJ정권 시절의 도청 행위는 아직 공소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검찰의 수사 추이에 따라 정치적 파장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국정원의 고해성사와 검찰의 수사 확대 방침 등 국가 권력기관의 강 드라이브가 청와대의 정면돌파 천명(3일) 이후 급속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도 석연치 않다. 야권 일각에서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가 DJ와 그 핵심들에 대한 ‘제거작전’에 돌입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정황에서 기인한다.

차기 대권구도 노림수

그렇다면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는 왜 DJ와 주변 인사들을 겨냥하고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 야권의 한 중진의원은 사견임을 전제로 “진전이 없는 연정론 해법 및 차기 대선플랜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중진은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과의 연정 제안이후 여권내 호남의원들이 동요하는 등 연정론은 혼란만 가중되고 있을 뿐 이렇다할 성과물을 얻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라며 “노 대통령의 도청 테이프 공개 의지는 실패한 연정정국을 돌파하기 위한 또다른 승부수”라고 전했다. 이 중진은 또 “여권 내 차기 대선경쟁이 호남 vs 영남의 대결구도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잠룡들을 견제하기 위해 정면돌파 카드를 꺼내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정치권 관계자들도 노 대통령의 정면돌파 이면에는 정치적 실익 챙기기 등 뭔가 노림수가 있을 것이란 의혹을 품고 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정국 반전 카드로 연정론을 직접 띄웠지만 실익은 커녕 부메랑에 시달리고 있다. 대연정 대상으로 지목했던 한나라당은 물론 소연정 대상이었던 민주당과 민노당 등 군소정당으로부터도 정략적 발상이라는 등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다. 여기에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제안 이후에는 우리당 내 호남의원과 소장파 의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따라서 노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연정론을 수습해야 할 처지다. 이런 상황에서 안기부 X파일은 연정론 실책을 만회하는 동시에 정국주도권을 장악할 호기인 셈이다. 도·감청 사건에 보다 자유로운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가 YS와 DJ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는 X파일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을 것이란 분석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노 대통령이 DJ를 겨냥하고 있는 이면에는 여권 내 차기 대권 플랜과도 무관치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현재 여권내 대권경쟁은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천정배 법무장관을 축으로 한 호남권과 김혁규 상임중앙위원과 김두관 특보를 중심으로 한 영남권의 대결양상으로 좁혀지고 있다. 차기 구도와 관련해 노 대통령은 아직 노심(盧心- 노 대통령 의중)을 드러내보이지 않고 있지만 결국 팔은 안으로(영남) 굽을 것이란 시각이 많다. 노 대통령이 호남권에서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DJ를 견제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노심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DJ와 국민의 정부가 도덕적 타격을 입게 될 경우 호남을 지역적 기반으로 삼고 있는 정동영·천정배 두 잠룡의 대권행보도 주춤할 수밖에 없다.결국 DJ를 묶어 둠으로써 여권내 호남 잠룡들을 견제하는 동시에 차기 대권구도를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가 구상하는 플랜에 따라 진행시키겠다는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권력은 살아 있는 생물 “그때 그때 달라요”

DJ와 노 대통령은 현재의 민주당에 뿌리를 둔 전·현직 대통령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지난 대선때 DJ가 노 대통령을 막후 지원했을 것이란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노 대통령이 불리한 여건을 딛고 대권을 거머쥐게 된 배경에는 DJ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했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하지만 노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대북송금 특검을 받아들였다. 특검 수사 과정에서 DJ정권 당시 경제팀을 이끌었던 이근영·이기호씨 등이 전격 구속됐고, DJ의 핵심 측근인 한광옥·임동원씨, 박지원 전실장의 비서 등이 특검팀에 소환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노 대통령과 DJ의 관계가 대립·갈등으로 비화된 대표적 사건이었다.

특히 DJ는 측근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는 것을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재임기간중 가장 대표적인 치적으로 꼽혔던 남북정상회담도 특검 한 방에 날려 버리는 수모를 감내해야 했다. 특검 파문으로 앙금의 골을 쌓은 두 사람은 또다시 민주당 분당 사태에 직면하면서 악화 일로로 치달았다. 당시 민주당 구주류(민주당 잔류)는 ‘신당 반대’ 입장을 고수한 반면 신주류(열린우리당 창당 주역)는 ‘탈당후 개혁신당 창당’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공식적인 입장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DJ는 구주류 입장을, 노 대통령은 신주류를 내심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결국 2004년 1월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면서 민주당은 두 동강 났고, DJ와 노 대통령의 앙금의 벽도 높아져 갔다.

여기에 참여정부의 개혁 칼바람에 구주류 세력 및 DJ의 주변인물들이 대거 사법처리 됐다는 점도 두 사람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하지만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들은 총선이나 재보선 등 선거철만되면 DJ에 대한 애정공세를 펼치고 있다. 호남권 및 과거 민주세력에 대한 DJ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기부 X파일’과 관련한 검찰의 칼날이 DJ정권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어떤 선택을 할지 두 사람의 애증관계 변화와 맞물려 정가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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