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X파일’의 핵심 주역인 이학수 삼성그룹 부회장의 검찰 출두 이후 아직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등장인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검찰이 확보한 안기부 도청파일 문건에는 정·관계를 비롯해 재계·언론계 등 각계각층의 유력인사 38명이 등장한다. 이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저마다 정치권과 미묘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예를들면 거물 정치인 A씨를 통해 기업인 B씨가 연결되어 있고, 언론인 C씨는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과정에 밀착된관계가 생생히 드러나는 등의 형식이다.정계 인사 중에는 이미 언론에 보도된 DJ(김대중 전대통령)와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 거물급 인사들이 대거 등장한다. 이들 외에도 아직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유력인사들도 상당수에 달한다.

정·재계 거물급 대거 등장

특히 당시 일부 대권 예비주자들은 삼성측과 정치자금 문제로 접촉을 시도했던 정황이 드러나 X파일 사건의 또다른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과 이학수 부회장이 나눈 녹취록에 따르면 당시 대선 예비주자였던 A씨와 B씨는 삼성측에 각각 10억원과 3억원을 요구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3억원을 요구했던 B씨의 경우 3억원을 추가로 요구한 것으로 적시돼 있어 그 전에도 삼성측으로부터 적지 않은 정치자금을 제공받았을 것이란 의혹을 사고 있다. 하지만 삼성측이 이들 두 사람이 요구한 정치자금을 건넸는지 여부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다.이 전총재의 동생인 이회성씨와 서상목 전 한나라당 의원은 정치자금 및 정보교환 등을 위해 삼성측 고위인사들과 자주 접촉했던 대표적인 정계 인사로 분류되고 있다. 검찰과 정치권 관계자들도 이 전총재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이 두 사람이 정치자금 등에 깊숙이 개입돼 있었을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고흥길 한나라당 의원은 삼성과 이 전총재측 사이에서 막후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문건은 적시하고 있다. 특히 홍-이 녹취록에는 고 의원을 통해 삼성측이 이 전총재에게 상당액의 정치자금을 전달한 것으로 돼 있다. DJ의 핵심측근인 K 전의원과 이 전총재의 측근인 S 전의원도 정치자금 문제와 관련해 조연으로 등장한다. 재계 인사 중에는 이건희 삼성그룹회장과 이학수 부회장이 대표적이지만 공개되지 않은 거물급도 적지 않다. ‘안기부 X파일’ 사건과 관련해 검찰의 칼날이 삼성을 정조준하자 삼성측이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냐”며 볼멘 소리를 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K그룹 K 전회장과 M사 L회장, K사 고문을 역임한 S씨가 대표적이다. 특히 이들 재계인사들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는 배경에 당시 대선주자였던 거물급 인사가 문제의 재벌기업에 자금지원을 청탁하는 듯한 내용이 들어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관계·언론계 인사도 상당수

관계인사 중에도 거물급이 대거 등장한다. 전직 총리를 역임한 L씨와 또다른 L씨, J씨, 부총리를 지낸 K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거물급 관계 인사중 두 세 사람은 당시 대권주자 하마평에 오르내릴 정도로 대중적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었다. L씨의 경우 삼성측이 L씨가 이번에 대선후보가 안되더라도 차기 정권을 기약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던 정황이 문건 곳곳에 묻어 있을 정도다. YS의 측근이자 정부 고위직 출신인 K씨는 모 기업으로부터 수억원대의 뇌물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논란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장관급인 K씨와 L씨도 등장하는데 L씨는 당시 수사당국으로부터 내사를 받고 있던 상황인 것으로 적시돼 있다. 홍 전회장이 당시 중앙일보 사장이었던 만큼 홍-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는 언론계 인사들도 다수 등장한다. 유력일간지 A 부국장은 DJ측 동향을 세밀하게 체크했고, 또다른 유력지는 “DJ가 대통령 되는 것은 절대 막아야 한다”며 간부급들을 대거 동원해 대선주자들과 관련한 동향을 예의주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이처럼 검찰이 확보한 도청 파일 문건에는 이미 공개된 인사들 외에도 30여명의 유력인사들이 주연 또는 조연으로 등장하고 있다.

검찰도 공개된 인사들 중 시민단체 등이 고발한 사람을 우선적으로 조사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이들 인사들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검찰이 내부적으로 ‘독수독과(毒樹毒果-불법으로 수집된 자료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이론의 직접적인 적용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향후 검찰 수사가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도청파일 사건 수사의 신호탄으로 해석된 이학수 부회장에 대해 검찰이 재소환 방침을 유보하고 있고, 이건희 삼성회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 회장에 대한 소환 문제도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검찰이 수사 인력을 두 배로 보강하면서 국정원 전현직 직원들을 잇따라 소환하는 등 사건 규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상황에 따라 고발된 거물급들을 우선적으로 줄소환할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 이 경우 도청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는 정·관계 등 각계각층의 유력인사들도 2차 소환 대상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관측된다.



# “나 떨고 있니” - 여의도 정가 ‘도청괴담’ 공포

“F의원이 연예인과 관계가 문제가 되자 5억원으로 입막음을 한 것 같더라.” “평소 여자관계가 복잡한 D씨는 이번 도청으로 꼬리가 잡혔다더라.” ‘X파일 후폭풍’이 여의도를 강타하고 있다. DJ 정권 때도 암암리에 도·감청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사생활이 복잡한 일부 인사들은 ‘도청 괴담’에 밤잠을 설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각종 루머들이 여의도를 중심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특히 연예인과 함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인사들은 혹시나 인터넷에 이름이 공개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소문도 들린다. 최근에는 모 의원이 테이프를 입수했다는 등의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각종 루머에 거론되고 있는 대표적인 인사가 A의원이다. A의원의 경우 최근 여비서와 부적절한 관계가 있다는 소문이 기정사실처럼 나돌고 있다. 특히 이 여비서는 이전에도 국회의원 보좌관이나 출입기자 사이에서 남성편력이 심한 것으로 소문나 있어 이같은 설에 무게감이 실리고 있다.

여성인 B의원은 남자 비서관과의 관계가 구설수에 오르고 있고, C의원 역시 유부남과 눈이 맞아서 고소 당하기 직전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까지 여의도 주변 인사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평소 여자문제가 복잡한 구 정권 실세 D씨가 이번 도청에서 꼬리를 잡혔다는 소문도 들린다. 전직 장관 E씨가 미국에서 낳은 사생아가 친자확인 소송을 냈다는 등의 소문도 여의도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도청 괴담’에 떨기는 연예계도 마찬가지다. 연예인의 경우 국회의원, 장관 등 고위층과 만날 기회가 많은 편이다. 때문에 ‘OO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지금은 브라운관에서 사라지기는 했지만, 한때 인기를 누렸던 연예인 F씨가 대표적인 예다. F씨는 과거 정권 실세인 한 인사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문제가 생기자 돈을 요구했다. 이 인사는 F씨에게 5억원을 주고 입을 막았다는 게 소문의 골자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같은 소문의 진위 여부에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친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주로 ‘누가 누구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더라’ 등의 확인되지 않는 소문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같은 설은 과거 한번쯤은 오픈된 내용이 대부분”이라면서 “최근 모 의원이 테이프를 입수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지만 가능성은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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